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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누구나 제목은 한 번쯤 들었을 명저인 '죄와 벌' 드디어 다이제스티 판이 아닌 완역본으로 읽었다. 읽은 날짜는 꽤지났는데 도저히 리뷰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아 못쓰고 있다가 드디어 쓰게 되었다. 축약본 조차 꽤나 긴 이 책을 완역본으로 보려면 800페이지가 넘는 무시무시한 두께의 책이 된다. 그리고 러시아 소설 특유의 등장인물의 이름이 헷깔리는 상황을 끊임 없이 마주하다보면  정신이 혼미헤지는 기분이든다.

 

 지독할 정도로 상세하고 치밀한 묘사를 읽다보면 가끔씩은 내가 살인을 저지른 로지온 마냥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는데 여기에 기여한 것은 당시 러시아의 고료 산정 방식에도 영향이 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의 고료 산정은 글자 수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하니 작품의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톨스토이와 달리 가난한 집안 출신인데다 개인적으로도 도박에 빠져있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상황에서는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축약본의 경우 로지온과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다보니 다른 등장인물들의 특색이 살아나지 않았는데 완역본으로 보니 로지온을 제외한 등장인물들도 굉장히 특색있고 흥미롭다. 대체 이 소설 한편에 이런 인물들을 어떻게 다 엮어 넣을 생각을 했을까라고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2. 줄거리

 

 아마 다들 이 책에 스토리에 대해 한번쯤은 들어보거나 읽어는 보았을 것이다. 어린이용 만화책으로도 많이 나왔으니 말이다.

 

 가난한 대학생인 로지온은 전당포를 운영하는 노파인 일리나를 계획적으로 죽이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일리나의 동생인 리지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게 되고 그의 범행이 들키려는 순간 운 좋게도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후 로지온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게 되고 결국은 포르피리의 압박과 소냐의 설득에 힘 입어 자수를 하게 되고 시베리아 수형소로 향하게 된다.

 

 이야기는 살인사건을 중심에 놓고 풀어나가지만 살인사건 그 자체보다는 그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 정확히는 살인사건을 일으킨 인물의 배경사상과 그 이후의 심리 상황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살인자의 분신과 같은 역활을 하는 인물과 주변인들이 그를 끊임 없이 자극하며 그의 행위와 사상의 괴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그게 읽는 사람이나 로지온을 끈덕지게 붙들고 늘어진다.

 

 

3. 죄

 

 그 유일한 이유인즉 자기가 계획한 일은 '범죄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로지온은 일종의 자아도취 상태이다. 그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일리나를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은 그를 벌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는다. 나폴레옹을 숭배하다시피 하는 로지온의 이런 생각은 그의 논문을 통해 은근슬쩍 드러내고 있다. 위대한 자는 법률을 초월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돈을 훔치고도 쓰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의 어머니가 겨우겨우 마련해서 보내준 돈마저 몇번 보지도 못한 소냐의 아버지의 장례식에 써달라고 다 줘버린다.

 

 로지온은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살인사건을 제외한 그의 행위들을 보자면 그가 진정으로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명예와 정의를 아는 인물 같다. 어려운 친구를 돕고 절망에 빠진 가족을 사려 깊게 돕는다. 그리고 눈앞의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진정한 가족의 행복을 챙긴다.

 

 또한 라주미힌 같은 친구를 가지고 있고 그의 주변 사람들 조차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난 이후 광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참을성 있게 그를 챙기는 것을 보면 (심지어 숙소의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자 조차!) 평소 그의 행실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 남음이다.

 

형씨, 극빈은 죄랍니다. 그냥 가난한 정도라면 아직은 타고난 감정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빈한 상태라면 아무도 절대 그럴 수 없지요.

 

 로지온은 소냐의 아버지의 입을 빌어 또 다시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 자신을 심정적으로 변호해준 소냐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챙겨준 것은 아닐까?

 

4. 죄1

 

 범죄를 저지르기 전 자신이 하는 일을 범죄라고 믿지 않았던 로지온은 대체 왜 자수를 하게 된 것일까?

 

 먼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일리나를 살해한 후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 버린 '리자베타' 일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두려움에 질려 살해 된 리지베타는 그를 끊임 없이 괴롭니다. 그의 범죄에 관한 신념은 시작부터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로지온 대신 살인자로 몰려 법정에 서게 된 노동자가 두번째 이유일 것이다.

 

 리지베타는 그녀의 언니인 일리나와 달리 굉장히 선한 인물이고 살인자로 몰리게 된 페인트 노동공은 대학생이었고 나름 지인식층인 로지온과는 달리 공권력에 쉽게 휘둘리는 약자이다. 분명 큰 사회적 선을 행하기 위해 한 행동에 의도치 않게 약자들이 말려들자 로지온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냐와 포르피리가 이 사실을 자극하고 자신의 이상과는 다른 초라한 모습을 쪼잔한 루쥔과 잔혹한 스비드리가일로프를 통해 만난다.

 

루쥔과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로지온이 가지고 있는 이상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루쥔은 가난한 두냐(로지온의 여동생)을 도우며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려 하지만 오히려 로지온의 반대 등으로 인해 모욕받자 당사자도 아닌 가장 약한자인 소냐를 자신의 음모에 끌어들여 쪼잔한 복수를 하려고 한다.

 

 사랑 때문에 두냐를 쫓아 페테부르크로 온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무 죄 없는 아니 오히려 자신을 구원해주었던 전 부인을 살해하는 일을 저지르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통해 소냐를 도와준다.

 

 

5. 죄2

 

 로지온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죄인지 아닌지 끊임 없이 고민하다 결국은 자수를 하며 이 책은 일단 끝이 난다. 그리고 에필로그 형식으로 이야기가 더 이어진다. 로지온은 재판을 받는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벌어졌던 혹은 행했던 일에 대한 모든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들이 감형의 이유가 된다.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 시베리아 유형지로 보내진 그를 괴롭히는 것은 고된 노동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빈약한 식사도 아닌 자신의 죄를 인정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병이 났던 것이다. 오, 만약 스스로 죄를 인정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중략) 자신을 아무리 엄중하게 심판하고 양심을 모질게 다져 봐도 지난 일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실책 외에는 유달리 끔찍한 죄를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다. (중략) 저 무슨 선고의 '어처구니없음'과 타협하고 그것에 굴복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대체 그는 왜 자수를 했던 것일까? 정말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말처럼 공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죄가 스스로를 죽이지 않기 위해 사회적 처분이 필요했던 것 일까?

 

 책은 애매하게 결론을 맺는다. 로지온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한 모습을 보이며 갱생을 하는 것 같이 해놓긴 해놨는데 정말?? 이라는 물음표를 남긴다.

 

6. 마치며

 

 죄와 벌이라는 것은 참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영역인것 같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률로서 엄정히 벌을 집행했다고 할지라도 그 범죄에 대한 죄과를 다 치뤘다고 할 수 있을지 또는 피해자가 용서를 해야만 할지 관해서는 늘 의문이 든다.

 

 범죄를 저지르고 정신착란에 빠져 자살이라도 할 것 같던 로지온은 공적인 영역에서 벌이 부과되자 억울한 생각이 든다. 사실 요즘 이런 상황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일본은 위안부 합의로 인해 모든 일이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참 고민되는 일이다. 공공의 법 집행이 범죄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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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보통 글을 쓸 때 처음 시작으로 무성의 하게 책 표지를 올리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저자인 기드 모파상의 사진을 올렸다. 왜냐하면 이 책은 모파상의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이다. 벨아미는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벗' 이라는 의미이다. 책을 아주 쉽게 폄하하여 요약하자면 뭣 모르는 시골에서 상경한 청년이 파리에서 잘생긴 얼굴을 믿고 여자들을 이용하여 성공하는 스토리이다. 그래서 저자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저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개인적인 궁금함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염이 참 멋지신분 같다.)

 

 책을 읽고 난 후 놀란점이 있다. 어떻게 보면 요즘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막장 드라마보다 약간 수위가 높아 보이는 이야기가 무려 '사실주의 소설' 로서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인데 나중에는 고개를 끄덕일만 했다. 어떻게보면 참 반전이랄 것이다.

 

 한 때 유행했던 TV 드라마에서처럼 조강지처를(애초에 조강지처랄 것도 없지만) 버리고 딴 여자를 만난 남자의 파멸 따위는 이 책에서 고려 대상이 전혀 아니다. 그건 허구인 소설 속에서나 이야기지 이 사실주의적 소설은 그런거 없다. 영화 '식스센스' 이후 강박적으로 반전을 추구하는 창작물의 세태에서 다른 의미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2. 줄거리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조르주 뒤루아는 알제리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다 전역하고 프랑스 파리로 온다. 꽤나 큰 꿈을 안고 파리로 상경했지만 북무 철도 사무원으로 일하는 그의 생활은 곤궁하기 그지 없다. 그의 생활은 마치 갓 시골에서 상경해 사람들이 자신을 얕잡아 보지는 않을까 하며 전전긍긍하는 시골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 그에게 행운이 찾아오는데 바로 전우로 있었던 포레스티에를 만나서 우연히 상류사회의 파티에 참석하고 그가 근무하느 신문사 '라비 프랑세즈' 에 입사를 한 것이다. 파티에 참석하면서 뒤루아는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얼핏보게 되고 상류사회로의 진입을 열망하게 된다.

 

 그때부터 뒤루아는 자신의 재능(매력)을 십분 발휘하여 신분상승을 추구한다. 필요에 따라 여자를 유혹하고 더 높은 계단에 발을 디디기 위해 원래의 여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한다. 그러는 와중 마음만 앞설 뿐 글한줄 제대로 쓰지 못하던 기자 뒤로아는 장관을 글 몇편에 매장시켜버릴 정도로 뛰어난 논평가로도 성장한다.

 

 뒤루아의 욕심은 점점 더 커져간다.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을 경멸하면서도 그들 처럼되기를 원하고 결국은 자신의 정부였던 이의 딸과도 결혼을 하게 되는데.

 

 

3. 마치며

 

 책은 인간의 추악한 욕망 혹은 순수한 욕망과 그 힘을 잘 드러낸다.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살아남기 위해 식사를 굶어가며 다음 월급을 기다리며 궁상 맞게 살아가는 뒤루아를 밀어 올린 것은 상류층을 향한 욕망이었다. 실제로 책을 보면 알 수 있듯 뒤루아는 그렇게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소심하고 게으르다는 표현이 옳다. 대학을 가려고 했지만 포기하고 군인으로 성공하려고 했지만 일찍 전역해버린다. 그래서 도피하듯 도착한 곳이 파리였는데. 거기서도 성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고 있는 그를 최상류층으로 밀어 붙인 것은 얼핏 엿본 상류사회와 그에 대한 욕망이었다.

 

부유하고 유명한 권력가의 집 만찬에 초대되고 야회복을 입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소설은 이 사회에서 사랑이나 결혼은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의 결과와는 거리가 먼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오히려 작중에 단 한번도 결혼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정부로 지낸 '드 마렐' 부인과의 관계가 육체적 욕망이긴 하지만 가장 순수한 감정에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들 정도이다.

 

뒤루아 씨, 저는 사랑에 빠진 남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은 바보가 되는 법이거든요.

 

  모파상이 뒤루아라는 캐릭터를 빌어 설명하는 프랑스 파리의 상류 사회는 모순 덩어리다. 결혼은 성공의 발판을 위해서 사용되고 사랑과 육체적 쾌락은 정부를 통해서 충족 시킨다. 정부고위 관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권력을 남용한다. 그리고 선출된 인물들 마저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선출된 이유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언론이 행하는 일은 사회 정의와는 관련 없이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이 있다. 권력과 결탁하여 돈벌이를 위해 확인도 되지 않은 글이나 정부의 청탁을 받은 글을 그대로 실을 뿐이다.

 

 그런데 무섭도록 놀라운 점은 이런 것들을 잘 활용한 뒤루아는 성공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인 뒤루아의 파멸이 혹은 그를 막는 난관이 언제 나올까 싶지만 그런게 없다. 난관이 없다기 보다는 있긴한데 솜씨 좋게 해치운다. 사랑을 팔아서든 부인을 팔아서든 말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쉬이 인정해주는 것을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는 결국 자신이 다니던 신문사의 사장의 딸인 쉬잔과 결혼식을 올린다. 사장은 국채 투매로 거대한 부를 이루어 파리에서 제일가는 부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원래 처와 간통죄라는 명목으로 이혼을 하고 자신을 무시하던 장관을 여기에 엮어 파멸시킨다.

 

 그리고 쉬잔과의 성대한 결혼식 당일

 

 그는 구경꾼들이 울타리를 이룬 높은 돌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그러나 그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눈앞에는, 거울 앞에 앉아 그의 관자놀이 위 곱슬머리를 매만지던 드 마렐 부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책에도 잘 찾아보면 꽤나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노르베르 드 바렌' 이라는 인물이다.

 

"난 인간의 정신이, 돈 많은 갑부들의 돈을 눌러 이기는 승리를 위해 건배하겠네."

 

 그렇다면 그의 일생을 어땟을까.

 

밤에 집에 돌아가도 혼자이고 아무도 돌봐 줄 사람이 없고, 게다가 내 주위에 정체 모를 위험, 알지 못하는 무서운 것들이 우글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견딜 수가 없다오. 낯선 이웃과 나를 가로막은 벽은 멀리 보이는 별처럼 그와 나를 떨어뜨려 놓고 있지

 

 가끔 이런 책들을 보면 인간은 끊임 없이 발전했다고는 하는데 근본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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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얼마 전 (그러기엔 상당히 시간이 지났긴 하다.) 2017년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이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것보다는 이 책이 판타지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판타지 소설을 참 좋아하는데 소위 말하는 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양판소 소설이건 톨킨이 쓴 책이건 그 상상력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체 노벨상을 받는 작자가 판타지 소설을 쓰면 어떤 소설이 나올까 싶어서 읽어보게 된 책이다.

 

 혹시나 들어가기에 앞서 오크와 엘프, 검과 마법이 난무하고 젊은 주인공이 유쾌한 모험을 떠나는 소설을 기대하고 있는 분들은 그냥 장바구니에서 책을 빼고 뒤로가기를 누르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소설은 영국의 궂은 날씨처럼 지독하게 음울하고 초가을 해뜨기전 대교에 뿌옇게 낀 안개처럼  답답한 이야기가 전개가 된다.

 

2. 줄거리

 

 줄거리는 꽤나 단순하다. 도깨비와 용이 활보하던 먼 옛날 아서왕이 용을 물리치고 브리튼족과 색슨족의 통합을 이루어낸지 얼마되지 않은 시대이다. 그리고 매우 낙후 된 촌락지방의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가 자신들의 아들을 찾아가기 위해 여행을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매우 사랑하는 사이지만 특이한 점이 있다. 그건 바로 과거의 기억이 제대로 공유가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은 분명 현재를 살아가고 단 한순간도 떨어지려 하지 않을만큼 서로 사랑하지만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기억이 없다. 그들은 심지어 왜 자신들이 그 동안 아들을 찾아가지 않았는지에 대한 기억도 없이 어느날 문득 찾아온 기억의 편린을 시작으로 아들을 찾아가기 위한 여행이 시작된다.

 

 부부는 여행의 과정에서 특이한 일들과 많이 마주친다. 그들의 과거를 기억 할 것만 같은 이들, 색슨족으로 태어나 브리튼족을 위해 봉사했지만 비참하게 쫓겨난 색슨족의 전사, 위스턴과 용 케리그를 쫓는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 도깨비에 물려 마을에서 쫓겨나면서 어머니를 찾으려고 하는 데드윈까지.

 

 

 

3. 망각, 기억, 용서

 

 위 세 단어가 이 책 최대의 주제이자 키워드가 아닐까한다. 누군가는 망각이 인간의 최대의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수능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에게 그런말을 한다면 헛소리 하지말고 망각이야 말로 인간 최대의 저주라고 답변할 지도 모른다.

 

 반대로 수험생에게는 기억이야 말로 인간 최대의 축복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방금전 사랑하는 연인과 가슴아프게 헤어진 사람에게는 지금 당장 기억을 날려버리길 바랄지도 모를 일이다.

 

 기억과 망각은 모두 용서와도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건을 망각함으로써 용서를 할 수도 있고 기억함으로써 사죄할 수도 있다. 과연 어떤 것이 바람직하고 옳은 일인가에 대해 질문한다면 누가 과연 그것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잘못된 일이 사람들에게 잊힌 채 벌받지 않기를 바라는 신은 어떤 신인가요?"

- 위스턴 -

 

"이 땅이 망각 속에서 쉴 수 있게 해줘요."

- 가웨인 -

 

학살과 마법사의 술수 위에 세워진 평화가 영원히 유지 될 수 있을까요?

- 위스턴 -

 

 위스턴은 사람들의 기억이 돌아오길 원한다. 가웨인은 망각을 통해 평화를 유지 할 것을 주장한다. 사실 색슨족과 브리튼족은 이 망각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전에 있었던 끔찍한 학살은 잊어버리고 서로 이웃을 한 채 서로 즐겁게 웃고 떠들 수 있었다. 가웨인은 기억이 돌아온다면 다시금 처절한 학살과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 주장하고 언젠가는 돌아올 기억임으로 그것을 굳이 지금 당장 꺼낼 필요는 없다고 위스턴을 설득한다. 하지만 위스턴은 그것을 거짓평화라고 평가한다. 잘못된 일은 잊혀질께 아니라 처벌을 받고 고쳐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모습이 예전 굴 속에서 가웨인이 목을 베었던 괴물개의 머리를 연상시켰고

액슬은 다시 우울한 기분이 몰려왔다.

 

 가웨인에게 *망각*은 용서였지만 위스턴에게 *망각* 이란 가식과 거짓이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를 기억해줘. 네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느꼈던 이 우정과 우리를 기억해줘."

- 비어트리스 -

 

전사에게 했던 약속. 모든 브리튼족을 미워해야 한다는 약속.

그러나 분명 위스턴은 이들 다정한 부부까지 그 안에 포함시켜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 에드윈 -

 

 위스턴은 에드윈에게 스승이자 형으로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러가기전 에드윈에게 약속을 강요한다. 브리튼족을 미워하라고 자신이 색슨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헌신과 용맹을 무참히 짓밟고 그를 떠나게 한 브리튼족에 대한 증오를 다음세대에 전달한다. 하지만 에드윈 역시 브리튼족과 같이 살았었다. 그들은 어린 에드윈에게 빵을 나눠주고 돌봐줬었다. 소년은 그 증오의 감정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위스턴에게 그러마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비어트리스가 자신들의 우정을 기억해달라고 한다. 위스턴이 전달한 증오는 이 *기억* 때문이지만 비어트리스는 *기억* 을 통해 화합과 용서를 구한다. 

 

"더 디게 낫는 상처도 결국 다 낫게 마련이지요."

- 액슬 -

 

'아마 안개 덕분에 오래된 상처가 아물 수 있었을 거예요."

- 액슬 -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책 상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액슬은 비슷한 말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문장이 아닌 앞뒤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게 느껴지는데. 그것이 결말을 해석함에 있어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궁금하다면 직접 사서 보도록하자.

 

4. 마치며

 

 작가는 이 책을 유고 내전과 르완다 학살에서 영감을 받고 썻다고 한다. 르완다 학살은 사실 잘 모르겠고 유고 내전이라면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거치면서 뉴스에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보스니아 내전에서 자행된 인종청소에 관한 이야기도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20세기를 거치며 많은 국가들이 강대국의 강요로 인해 망각과 용서를 강요 받았다. 그리고 그 강요된 망각이 기억으로 터져나온 것이 어쩌면 저 유고내전과 르완다 학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마치 멀린의 마법처럼 힘으로 짓눌러 강요된 망각이 풀리고 - 마치 용이 늙어가듯 강대국이 힘이 약해지고 - 기억이 돌아오는 날 정의와 복수라는 이름아래 행해지는 무자비한 사건들을 바라보며 우린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

 

 이런 일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로힝야족이, 중동에서는 팔레스타인과 쿠르드족의 정부수립 투표와 같은 형태로 말이다. (물론 유럽에서는 스페인의 카스티야와 바스크, 영국에서는 북아일랜드와 스코트랜드, 이탈리아 역시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역시 얼마전까지만 해도 위안부에 대해 정부에 의한(?) 강요된 망각과 용서를 당할 뻔 했다.

 

 사실 아직도 작가가 찾고 있는 해답에 대해서는 잘모르겠다. 망각에 취해서 용서를 해라는 것인지. 아니면 아픈기억을 끄집어 내서라도 진정한 화해를 하라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좋은 기억을 쌓아감으로써 긴 세월에 걸쳐 용서를 하라는 것인지 말이다. 물론 여기에 대한 해답은 각자가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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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해변의 카프카는 참 오래된 책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이다. 근래 나왔던 하루키의 최신작인 '기사단장 죽이기' 를 읽고 애매가 끼인 휴가 덕분에 어디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예전에 좋아하던 책이나 한번 더 꺼내 읽게 되었다.

 

 아마 이 책을 완독 한 것이 올해를 포함해서 4번 째인 것 같다. 처음 읽었던 시절은 고3 때 였고,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그리고 20대 중반에 그리고 올해까지... 이 책을 읽을 때 마다 드는 생각은 참 읽을 때 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때는 못봤던 것이 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책을 4번 읽을 동안 가장 심신이 안정 되어 있을 때가 지금인 것 같다. 다른 시기에는 인생에 쫓기듯 생활 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런게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 전에 읽을 때에도 나의 느낌을 정리 해두고 싶었지만 정리를 못했었다. 아마 그 때와 지금은 다르겠지만 오래된 숙제를 해 내듯 글을 풀어보고 싶다.

 

2. 책의 내용

 

 책은 크게 두 인물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한명은 다무라 카프카라는 특이한 이름을 지닌 (자신이 지어낸) 15세 소년이고 한명은 나카타라는 노인이다.

 

 다무라는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이었다. 그렇지만 다무라의 어머니는 다무라가 어렸을 적 그의 얼굴 모를 누나와 가출하고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다무라는 계속 집에서 지낸다면 자신이 훼손 당할 것을 우려하며 15세 생일에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15세' 가 되기를 결심하며 집에서 가출을 결행한다. 다무라는 가출을 하고 우연히 행선지로 정한 다마쓰카에서 자신의 누이일지도 모를 여인과 자신의 어머니일지도 모를 인물을 마주친다.

 

 나카타는 특이한 노인이다. 2차 세계대전 전에 태어난 이 노인은 다무라와 마찬가지로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는 굉장히 똑똑했으나 모종의 사건 이후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소위 말해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노인은 고양이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림자가 남들보다 옅다는 특징이 있다.

 

 소설은 다무라가 가출 이 후  다카마쓰에 있는 고무라 도서관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기묘한 사건과 나카타가 다무라를 행로를 따라 오는 여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현실과 꿈, 이데아를 넘나들며 이야기 속에 철학을 곳곳에 숨겨 놓고 독자들이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3. 마무리

 

 책을 보고 있노라면 재미있는 생각이 든다.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겪고 있다. 다무라 카프카는 가장 가깝고 사랑 받아야 할 인물인 가족으로부터 어린시절 버림받고 아버지로 부터는 저주를 받는다. 그리고 사에키 역시 첫사랑이 죽은 이후 타인과는 깊은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 나카타는 기억을 잃은 이후 아예 그런 관계에 대한 관념 자체가 사라진듯 하다. 호시노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인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회에서 일종의 아웃사이더 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의외로 책 속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도움을 받고 도움이 되어 준다.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15세 소년이 되어 홀로 살아남겠다던 다무라에게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 고무라 도서관에서 만나는 인물들 그리고 간접적으로 도와준 것 처럼 보이는 나카타와 호시노까지 타인과 관계를 가지지 안을려고 노력하고 살던 인물이 보이지 않는 관계로 엮이고 서로를 변화시키고 삶을 한단계 더 밀어 올려준다.

 

 책의 주요 등장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사에키씨는 현재가 없고 나카타는 과거가 없다. 둘다 가슴 한쪽이 텅빈 상태이다. 그래서인지 그림자도 남들보다 짧다. 두 사람다 우연 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상실을 겪고 난 후 비어버린 가슴한켠을 메꾸지 못한다. (사에키의 경우 어린 시절 부터 사랑했던 연인을 잃었고 나카타는 조금씩 차오르던 애정이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우발적 폭행으로 훼손 혹은 상실 된 것 같다.)

 

 다무라 역시 어머니와 누이의 상실로 인해 안이 빈 상태였다. 아니 완전히 비었다기 보다는 분노와 증오가 그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싸우는 상태였다가 더 정확한 표현 일 것 같다. 다무라는 가출 후 거친 세상속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15세'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리고 외부의 압력으로 부터 견디기 위해 강력한 벽을 이야기 한다.

 

 그렇지만 이 소년은 누군가로부터 계속 도움을 받는다. 소년을 쫓아 이동하는 나카타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로 부터 계속해서 도움을 받는다. 사에키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무라와 관계를 맺으며 그녀 안에 공허한 부분을 일정부분 메워 현재를 되찾고 고무라 도서관에서 조우한 나카타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전달 해준다. 다무라를 림보에서 구원해 준 것은 다무라의 가슴 한 켠에 남은 사에키다. 그리고 나카타를 마지막으로 구원해 준 것은 호시노가

아닐까?

 

 우리는 태어난 이후 끊임 없이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 태어 남으로써 안락한 자궁을 상실한 이후 성장하고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더 많은 것들 역시 상실 할 가능성은 점점 커져만 갈 것이다. 인간관계란 참 어려운 것 같다. 서로를 보듬어 주기도 하지만 서로를 찌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지독하게 찔린 이들을 한 대 모아놓고 서로가 서로를 보충해주는 곳이 소설에서는 고무라 도서관 일 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는 호시노가 철학과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매춘부를 하는 학생과 관계를 맺으며 헤겔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 하며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서로가 객체이자 주체로써 서로를 투사한다.'

 

 내 생각에는 이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큰 철학이 이것이 아닐 까한다. 결국 자신의 존재를 증명 해 줄 사람은 결국 타인이다. 상실로 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터프한 마음가짐 혹은 높은 벽이 아니라 편견 없는 이해와 관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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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왔다고만 하면 서점가에 신드롬을 일으키는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1Q84 이후 실로 오랜만에 나온 장편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굉장한 팬임을 밝히며 서평은 언제나 주관적이었지만 더 주관적으로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미리 밝힌다.

 

 실로 오랜만에 나온 장편소설이다. 나는 정확히는 그의 장편소설에 열광적인 팬이다. 단편소설은 그럭저럭 읽었지만 에세이는 거의 읽어본적이 없는 편이다. 일종의 반쪽짜리 팬인가? 아무튼 예약구매로 도착한 책이 도착 하자마자 몇몇 방해를 이겨가며 그야말로 탐닉하듯이 책을 읽어 내었다. 간결하면서도 몰입도 있는 그의 문체는 여전했고 다시금 완전한 1인칭으로 변한 시점은 과거 "상실의 시대" 나 "태엽을 감는 새" 시절로 돌아간 듯 한 느낌을 주는 소설 책이었다.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하는 이유

1. 무라카미 하루키다. 뭐가 더 필요하지?

2. 그 때 그 시절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한 책, 그렇지만 왠지 나이든 작가를 느끼게 해주는 책

 

  평소처럼 키워드를 뽑아서 서평을 적어보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 머릿속으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간결하게 풀어낼 자신이 없다는게 사실라 일단 간략하게 감상이나 적어보자 한다.

 

  내가 느끼기에 이전 소설인 '1Q84'는 하루키 소설 치고는 굉장히 대중적인 성격이 강한 소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번 소설인 '기사단장 죽이기'는 다시금 1인칭으로 돌아가버린 시점 마냥 굉장히 매니악한 성격이 강한 소설이 되어버린 것 같다. (뭐 나야 좋지만) 하루키의 소설들을 많이 읽고 소위 말하는 '하루키 월드'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소설에서 수 많은 그동안 그의 소설에서 보았던 수 많은 클리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혼, 아이 없는 부부, 욕심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남자 주인공, 어둡고 커다란 구멍, 이데아, 메타포, 섹스 등등 말이다. 하루키 소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들에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면 수 많은 상징과 기호로 가득찬 메타포의 세계에 뜬금없이 내던져저 헤메다 불쾌해진 채 책을 집어 던질 지도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의 이색적인 특징은 평소와 굉장히 다른 느낌의 결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하루키의 장편소설들은 대부분 열린 결말이었다. 이전 소설인 1Q84는 현실 세계로 돌아온 듯 그렇지만 아닌 듯한 결말로 인해 사람들이 다음권이 또 나오냐는 질문과 추측이 인터넷에 쇄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비록 허무하긴 했지만) 예약 구매를 하며 같이 산 비하인드 북의 인터뷰에 보면 분명 닫힌 느낌의 결말이라고 했다. (내가 느끼기엔... 1권으로 다시 가시오 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해변의 카프카' 는 내가 아직까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책이자.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으로 알게해준 책이었다. 이 책이 한국어로 출간된지 대략 14년 쯤 되었을 것이다.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 만큼이나 어렸던 나는 어느 새, 이 책의 '나' 만큼이나 나이를 먹고 말았다. 그 때의 다무라 카프카도 이데아를 보았고 메타포 속을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올해 다시 나타난 '나'도 이데아를 보았고 메타포 속을 헤메고 다닌다. 미묘하게 같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문득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번 더 읽어보고 다시 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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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사실 다 읽기는 했는데 잘 모르겠다. 사실 뭐라고 리뷰를 남겨야 할 지 당황스러운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무슨 내용인지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이 읽기 시작한 책이 읽는 내내 답답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책 바로 이전에 읽었던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때와 같이 나에게는 완전히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일까? 그리고 다 읽고 난 후에는 흔한 레즈비언의 사랑에 관한 소설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저자 후기에 보니 이 책이 나온것이 1950년 대 라는 점에서 굉장히 놀랐다.

 

 요즘에야 BL 소설도 흔한 세상이지만 1950년에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상상해보곤 이 책이 출판 된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이 책이 이쪽 계통 소설에서 처음으로 헤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사실에 또한 번 놀라움을 주었다.

 

 힘겹게 살아가는 테레즈는 무대 연출을 꿈꾸는 절은 여인이다. 그에 비해 캐롤은 이미 아이를 하나 두고 있는 지금은 남편과 이혼을 준비중인 부잣집 여인이다. 이 둘의 만남은 꽤나 극적이라면 극적이고 평범하다면 평범하게 이루어진다.

 

 스스로가 상류층임을 과시하듯 거만하고 아름다운 캐롤과 성인이지만 마치 여전히 덜 성숙한 아이같이 자신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생기면 그것만 바라보고 생떼를 쓰는 테레즈의 사랑은 이색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도 마찬가지이다.

 

 그 둘의 사랑을 비난하는 리처드, 질투를 하는 애비, 그건 개인의 취향이나 사적인 공간으로 취급하는 데비, 그리고 그 둘의 살아을 이용하려는 많은 사람들 하지 등 이들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은 우리가 여전히 성소수자들을 대하는 시선이 이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 었다. 그리고 이 둘의 사랑뿐만 아니라 남성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도 담겨있다.

 

 찬찬히 읽고 생각을 정리해보면 꽤나 재미있는 책이었다. 치밀한 심리 묘사와 몸만큰 어린아이였던 테레즈가 진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보는 것도 꽤나 흥미롭니다.

 

 책을 읽고 내린 최종 결론은 그들의 사랑도 그저 우리가 평범하게 생각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첫눈에 눈에 불 꽃이 튀기듯 하여 사랑에 빠지고 조심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가는 과정과 갈등까지 책을 읽는 동안은 요즘 사랑 같지 않아 답답하기는 하지만 정말 평범한 사랑이다.

결국 성적 취향도 사랑을 이루는데는 어찌보면 하나의 장애물(마치 성격이나 금전적 문제와 같은)일 뿐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책 전에 이와 비슷한 주제로 나온 것 중 가장 최근에 본 것이 '아가씨' 였다. 비록 장르가 다르긴 하지만 아가씨가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한 수채화 같은 풍경이었다면 이 책은 흔한 과일 바구니를 그린 정물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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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장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아마 데미안은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이 구절에 관해서는 알 것이다. 고전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대체 이런 책을 초등학교 시절 필독도서로 올려 놓은 사람들은 진짜 책을 읽어보고 필독 도서로 선정을 하긴 한 것 일까라는 큰 의문이 든다. 물론 나도 안 읽기는 했지만 초등학생 때 이런거 읽었으면 아마 다시는 책을 잡을 생각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린이용으로 따로나오는게 있던 건 같지만 말이다.)

 

초판본 데미안 (방탄소년단 2집 앨범 모티브)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 이순학역
출판 : 더스토리 20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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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를 추천하는 이유

1. 소년의 영적, 정신적 성장기

2. 개인적인 의견이기는 하지만 성장하는 청소년들 보다는 그 아이들을 키우는 어른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내 마음대로 고른 주요 Keyword

1. 선과 악, 밝음과 어둠, 두 세계

 이 책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독실한 신앙을 지닌 유복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였다. 아이는 부모님의 세계 속에 속하여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의 불편한 마음을 모면하기 위해 했던 작은 거짓말로 인해 싱클레어의 밝고 안전한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크로머는 싱클레어의 거짓말을 이용해 소년의 발목을 그러잡고 어둠의 세계로 끌어들여 싱클레어의 인생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소년에게 아버지, 어머니도 모르는 자신만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내가 새긴 최초의 칼자국이었고, 내 유년 시절을 이루는 기둥에 가한 최초의 칼자국이었다.

 

 크로머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던 싱클레어는 새롭게 전학을 온 데미안에 의해 그 상황에서 벗어난다. 데미안은 여로모로 특이한 어른 같은 소년이었다.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마자 다시 그 예의 안전한 세계로 돌아가고 만다.

2. 비판적 사고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카인과 아벨,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싱클레어에게 생각을 하게 한다. 제도권 교육에서 일절 가르치지 않는 것들을 싱클레어에게 알려 줌으로써 비판적 사고를 자라나게 한다. 중세시대 였다면 바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당할 소리였다.

 

다른 아이들과는 전혀 판이한 데미안의 집중된 눈빛은 나에게 무언가 경고를 느끼게 했고 내 마음 안에서 의심과 비판적인 생각이 생겨나도록 했다.

3. 표적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헤어지고 나서 방황의 시간을 가진다. 질 나쁜 친구들을 만나 술에 흠뻑 취하기도 하며 선생님들과 부모님을 실망시키기도 한다. 그는 고독과 방황에서 구원해 준 것은 베아트리체였다.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가 타인의 힘을 빌어서가 아닌 스스로가 창조해낸 첫 번째 이상향(표적) 같은 것이었다.

 

이 베아트리체에 대한 숭배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어제까지는 조숙한 풍자꾼이던 나는 성자가 되려는 희망을 품은 사원의 하인이

 

 이후 싱클레어는 계속해서 자신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간다.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자신에게 비밀을 알려달라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피스토리우스는 분명 좋은 조언자이고 선생님이었을지 모르지만 싱클레어는 또 다시 떠나간다. 결국은 주변에서 그가 표적을 찾을 수 있게 도와 줄 수 있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임의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운명을 자신의 내부에서 송두리째, 그리고 온전하게 끝까지 지켜 내는 것이다.

4. 전쟁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자아를 점점 더 선명하게 만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데미안과 재회를 하고 그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만나면서 자신이 원하던 완벽한 이상향을 만난다. 싱클레어의 자아는 이렇게 완벽하게 완성이 되고 행복한 일들만 일어 날 것 같지만 세상은 싱클레어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결국은 전쟁이라는 피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 싱클레어를 휘말리게 한다. 아무리 자신의 자아를 단단하고 아름답게 완성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외부세계와 소통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는 것일까?

 

작별을 고하고 혼자 거실을 지날 때 풍겨 온 히아신스의 향기가 시들고 무미한 죽음의 냄새처럼 느껴졌다. 한 자락의 그림자가 우리들을 덮쳐 온 것이다.

 

 비록 외부적 사건으로 인해 그의 몸은 상처 입지만 그의 자아는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붕대를 감는 것은 몸시 아팠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나는 열쇠를 발견했고, 때때로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형상이 졸고 있는 그 곳, 내 자신의 내부에 완전히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개인적인 감상

▲ 좋았던 점

 일단 책이 기본적으로 좋은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것 같다. 한 소년의 성장기를 철학적으로 참 잘 쓴 것 같다. 이건 그저 이야기 속의 한 소년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들 형태는 다르지만 이런 성장기를 겪어 왔을 것이다. 부모의 보호 속에서 자라던 아이가 점점 커가며 자신만의 이상을 찾고 사상을 지니며 살아가는 모습, 그 결과와 과정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만 다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지내왔다.

 

 글의 서두에서 아이들이 읽기보다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지나고 나면 '아!' 하며 알지만 당시에는 왜 대체 그러는지 알아채지를 못한다. 이 책을보며 아이들의 성장이 어디쯤인지 다시 한번 느껴보면 어떨지?

 

 헤르만 헤세는 다른 책인 '수레바퀴 아래서' 와 마찬가지로 제도권 교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결국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인 사고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잘 아는 것이 아닐까? 현재이 제도권 교육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질문하지도 생각해보라고 하지도 않으니 각자도생으로 잘 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 이건 좀 그래

 책의 후반부에 전쟁이 발발하며 나오는 문장들에서 불편한 느낌이 난다. 나만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전쟁과 그 결과를 미화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이 쓰여지던 시대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중이던 1916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에 출간이 되었다. 이 전쟁에서 독일은 패했다.

 

  W.G 제발트가 '공중전과 문학'에서 전후 (2차 대전) 이후 독일 문학의 침묵을 비판했었다. 이 책의 결말 부를 보니 이 책도 마찬가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예전에 읽었다. '괴벨스'의 전기에서도 괴벨스는 1차 대전에서 패한것을 수치스러워 했다고 했다. 이 책의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 어떤 정신승리 같은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괜한 착각일까?

 

씨름에 완전히 진 일본인은 가버렸고 톨스토이 신봉자도 오지 않게 되었다.

 

이건 헤세의 전쟁결과에 대한 바램 아니었을까?

 

헤르만 헤세의 다른 책

[독서 노트/고전] -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전후 독일 문학에 관한 책

[독서 노트/인문(사회,정치,철학 등)] - 공중전과 문학 - W.G 제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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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누구나 제목을 알고 들어는 본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고전의 정의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책인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서평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1925년 작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는 사실 작가의 생전에는 잘 팔리지 않았던 소설 책이다. 초판으로 2만부를 찍어 내어 겨우 팔고 2쇄로 찍었던 것은 팔리지 않아 결국 작가가 죽을 때까지 그의 집 창고에 처박혀 있었던 책이 영화로 제작이 되고 미국 고등학생들의 필독 도서라고 하니 인생이 어떻게 풀릴지는 아무도 모르는게 맞나보다.

 

 '위대한 개츠비'는 사랑에 관한 책이다. 간단히 내용을 풀이하자면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세계 1차 대전 이후 미국 동부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위해 보여주는 그야 말로 모든 것을 바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체 무엇이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표현 했을까? 닉 캐러웨이의 시선을 따라 가보도록 하자.

 

위대한 개츠비 미니북 세트 (한글판+영문판)
국내도서
저자 :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 이기선역
출판 : 더클래식 201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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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기를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면?

1. 세계 1차대전 이후 미국의 시대상을 잘 알 수 있다.

2.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궁금하다면?

3. 정렬적인 사랑에 대한 로망 충족!

내 마음대로 고른 주요 Keyword

1. 서쪽과 동쪽

  책은 대조되는 것들 을 보여준다. 서부와 동부, 이스트 에그와 웨스트 에그, 돈 많은 자들과 가난한 자들, 이 책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서부의 명문가 출신의 남자이다. 이 사람은 금권주의의 가장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증권업을 배우기 위해 서부에서 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동부로 온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시 시대의 많은 계급층들을 대변하고 있다. 대부분 극단적인 인물들이 많은데 비하여 닉은 가장 균형잡히고 중립적인 인물로 묘사가 된다. 그는 서부 출신이지만 동부의 물질주의를 배우러 온데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편견을 가지지 않을려고 노력하니 아마 최고의 관찰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어지면 이 말을 명심해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너처럼 혜택을 누리고 사는 건 아니란다.

내가 살던 웨스트 에그는 이스트에그에 비해 덜 화려한 곳이었다. 사실 두지역은 상당히 다르고 대조적이라 이런 비교는 피상적일 뿐이다.

 

 개츠비가 서부 출신의 개천에서 용 난 흙수저 출신이라면 톰은 동부 출신의 그야 말로 날 때 부터 황금수저를 물고 자라난 인물이다.

 

 그리고 두 남자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데이지 역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여인이고 이와 대조적으로 톰이 바람을 피는 머틀은 톰을 통해 상류층의 진입을 꿈꾸는 하류층의 여인을 대변하고 있다.

 

 동부와 서부, 혹은 금수저와 흙수저의 삶은 너무도 달라서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개츠비가 뛰어난 능력으로 성공하여 매일 밤, 명사들을 불러 성대한 파티를 열고, 머틀은 톰과 조그마한 파티에 개최하고 개를 기르지만 이들은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였을 지도 모른다.

 

자동차 정비소에서의 풍만하고 육감적이던 생기는 이제 거만함과 오만함으로 바뀌었다. 웃음, 몸짓, 말투 등 머틀의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식적으로 변했고, 그렇게 그녀가 들뜰수록 집은 점점 비좁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창문과 커다란 문으로부터 공허감이 흘러나오더니 현관에서 형식적인 작별을 고하는 개츠비의 실루엣에 완벽한 고독을 더 했다.

 

 아까 닉을 굉장히 중도적인 인물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사람과 대조적인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바로 그와 애정을 나누었던 베이커이다. 닉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지만 캐서린은 닉과는 반대적인 의미로 동일하게 행동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워릭에서 열린 파티에 같이 갔을 때였다. 베이커가 렌터카를 몰고 왔는데, 차 지붕을 열어둔 채 빗속에 주차를 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일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기본 덕목 중에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그게 바로 정직함이다.내가 알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정직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2. 그렇지만 사랑, 하지만 돈

 위에서 나열 하였듯 이 처럼 절대 뭉치지도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인물들을 모아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이었다.

 

 개츠비는 1차 대전에 참전하기전 만났던 데이지를 사랑하여 멀고 먼 길을 돌아 그녀의 집 건너편에 대저택을 마련한다. 개츠비는 그가 데이지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서로의 사고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돈'이 부족해서라고 판단했다.

 

 능력있는 개츠비는 돈을 번다. 그가 돈을 번 방법은 자세히 나와있지 않지만, 유산 같은 것을 통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닌것 만큼은 확실히다. 불법과도 연계되어 있다는 낌새를 풍기며 그는 돈을 번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서 였다는 점이 참 놀랍다.

 

 개츠비는 부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예전의 '지미 개츠'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불행한 미래를 이미 암시했을 지도 모른다. 그

 

이런 행동은 깔금한 그의 매너와 별개로 불안정하며 예의도 없어 보였다. 개츠비는 한시로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다리를 떨거나 초조한 듯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에게는 태생적인 부자가 가지는 여유가 없었는 것 같다.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일군 것들이 하루 아침에 없어질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그의 태도와 갑작스럽게 등장한 부호라는 타이틀은 사람들에게 의심을 안겨 주었다. 아무튼 소문에 상관치 않고 그들은 파티를 즐겼지만 말이다.

 

 마침내 개츠비는 베이커와 닉의 힘을 빌어 데이지와 만난다. 데이지도 다른 여자에게 빠진 남편에 질렸던지 개츠비에게 빠져든다. 둘은 마치 오래된 연인 처럼 사랑을 속삭이고 개츠비는 자신의 파티에 데이지를 초대한다. 과연 그의 파티는 그녀가 즐겨왔던 파티와 어떻게 달랐을까?

 

데이지는 롱아일랜드의 한 구석에 자리한 웨스트에그의 저택에서 왠지 모를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낡은 완곡어법에 느껴지는 활기와 허무한 인생길에서 서로를 내리까는 사람들의 강렬한 생활력에 데이지는 소름이 끼쳤다. 그녀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단 순함에 무시무시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이 대목에서 이미 둘의 사랑은 이루어 질 수 가 없다는 것을 암시 했던 것 같다. 개츠비가 그녀를 위해 추구해왔던 것이 그녀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데이지는 오늘은 뭘할까, 내일은, 십년 후는, 이십년 후는 뭐할 까를 한가하게 고민하는 금수저였고, 개츠비는 하루하루를 계획하고 실천해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흙수저였다. 개츠비는 이미 이런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집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군요."

"데이지는 말할 때 신중하지 못해요."

내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뭔가......"

내가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죠."

개츠비가 내말을 받아쳤다.

 3.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사랑이 어떻게 끝날지 그의 이성은 다 판단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사랑이라는 그의 감정의 끈이 그를 다른 방향으로 억지로 끌었을 것이다. 결국 개츠비는 데이지의 죄까지 모두 끌어 앉은 채 죽고 만다.

 

 닉은 죽은 개츠비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동부의 진실을 깨닫는다. 그의 파티에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던 손님들은 그가 죽자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의 책임이 있던 데이지도 톰도 그를 친구라 부르던 울프심도 그의 집에 얹혀 살던 이들도 그가 죽고 그가 줄 돈이 없어지자 아무도 그를 찾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와 닉이 개츠비 저택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올빼미 모양의 안경을 쓴 건장한 중년 남자만이 개츠비의 장례식에 찾아온다.

 

"저거 말이오. 새삼 확인할 필요도 없어요. 전부 진짜요. 내가 확인해봤거든."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 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

 사랑이란 결국 어느 시대에나 공통적으로 공감되고 모든 이들이 고민하는 사항이니 여전히 이 책도, 고전 필독서라는 명목으로 통용되는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읽다보니 이 책의 내용이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잘 맞는데다가 우리나라의 드라마에도 잘 등장하는 소재라고 생각이 된다.

 

 삼포세대니 팔포세대니 하는 것도 결국은 다 돈 문제에서 비롯된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돈 문제가 해결 된다고 그 뒷 문제가 무조건 해결되는건 아니라는 것을 소설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책에서는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다들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겹치는 캐릭터가 없이 잘 살아있다는게 책의 큰 장점인 것 같다. 어쨋든 개츠비는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을 잠시나마 이루었다. 자신의 쌓아온 모든 것을 바쳐서 말이다. 비록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환상속에 인물과 좀 다르기는 하지만 그 환상을 간직한채 죽을 수 있어서 그나마 덜 불행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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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신비로운 나라일 것이다. 비록 법으로는 폐지 되었다고 하고 대도시에도 거의 찾아 볼 수는 없다고 하지만 여전히 카스트제도라는 신분제도가 존재하는 민주주의 국가이자 요가나 명상 등이 떠오르는 나라이다. (개인적으로 일로 엮여 있기 때문에 굉장히 싫어하는 나라 중 하나이다. 진짜 있다면 크리슈나라도 나타나서 좀 도와주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책은 부제처럼 이런말이 달려있다.

인도 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마하바라타에 있나니, 마하바라타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마하바라타는 단순한 하나의 고전 문학작품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인도인의 생활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철학이요 예술이며 역사요 일상생활이 되었다.

 

 실제로 책을 읽고 나자 우리가 흔히 짤로 많이 보며 웃던 인도 영화 혹은 드라마, 발리우드 작품속에서 나오는 상상력 터지는 장면들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마 한번씩 다들 이짤을 보았을 것이다.

(마하바르타의 아르쥬나와.. 한명은 누군지 모르겠다.)

 

2. 카르마(나를 지배하는 운명)와 다르마(내가 지배하는 운명), 인간 vs 신의 대리인의 전쟁

 

 이 책을 소설에 범주에 넣어야 할지는 의문이지만 소설로 치자면 모든 등장인물들이 등장 하는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카르마)를 타고 났다. 부모의 소원으로 인해 혹은 누군가의 저주로 인해 누구를 죽일 것이며, 누군가에게 어떻게 죽을 것이며 등이 전부다 정해져있다. 소설로치자면 이미 결말이 정해져있다는 소리이다. 그렇지만 책에서 많은 인물들은 계속해서 다르마를 지켜라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죽을 때 죽더라도 수행할 의무나 지켜야할 법칙 같은 것을 지켜라고 끊임 없이 강조한다. (그러면 내세에 더 좋은 삶이 보장 됨으로)

 

 이야기의 중심은 판다바 형제들 5명과 카우라바 형제들 100명의 처절한 싸움을 주로 다루고 있다.

 사실 판다바 형제들은 다들 인간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다들 신의 아들들이고 그에비해 카우라바 형제들은 그저 평범한 인간의 아들들이다. (그런데 인간이기는 하지만 소위 말하는 대영웅급 인간인지 두료다나 같은 경우에는 비마와 맞짱을 뜨면서도 밀리지 않는 다고 나오는데...). 결국 그들의 카르마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었을지도 모른다.(신의 아들과 비누슈 신의 화신이 돕는 이들을 감히 인간이 어찌?)

 

 이야기에서 주로 악역을 맡는 두로냐다는 시기와 질투로 인해(혈통상으로 보면 자기가 적자라서 왕국을 다 가져야 하지만 다 가지지 못한데 화가나서) 판다바 형제들을 핍박한다. 판다바 형제 중 첫째인 유디슈티라는 다르마를 철저히 지키며 살아가지만 두료다나의 꾐에 빠져 주사위 노름을 하다가 나라를 판것도 모자라 형제들과 부인까지 팔아버리고 쫓겨나고 이로인해 판다바 형제들은 복수의 칼을 갈고 결국은 전쟁이 벌어진다.

 

 주로 악역을 맡기는 하지만 카우라바 형제들에게서는 인간적 느낌이 든다. 신에게 대항하는, 카르마에 대항하여 싸우는 듯한 연약한 인간에게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실제로 두료다나는 크리슈나가 실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비슈누 신의 화신임을 보여주지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꺽지 않았다.)

 

생각대로 잘 된다면 다행한 일, 그러나 운명이 우리를 저버려일이 꼬여 재난이 온다면 이 또한 예정된 운명일 뿐. 우리는 운명의 실에 묶여 예정대로 조종당하는 인형이란 말인가. 하는 수 없습니다. 나의 이름으로 유디슈티라를 주사위 놀이에 초청하십시오 - 드리타라슈트

 

 결국 전쟁에서 많은 것들을 잃는다. 많은 이들이 죽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던 판다바 형제들은 비겁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드로나를 죽이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다르마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고 불리며 늘 땅위 한뼘정도 떠있던 유디슈티라의 전차는 땅위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죽고만다.

 

3. 마치며

 

 마하바라타는 굉장히 방대한 분량의 서사시이다. 무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르 합친것 보다 8배나 분량이 많다고 하니 질릴 지경이다. 이 책은 완벽본은 아니고 주요 내용들을 풀어 놓은 것인데 이것만으로도 분량이 상당하다.

 

 마하바라타는 인도의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다. 결국 인간은 신들이 만들어 놓은 운명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 속에서라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록 수 많은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두료다나는 패배하여 죽을때 승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살아 생전에는 나는 위대한 왕이었고 친구들에게도 너그러웠으며 적에게는 무서운 존재였다. 신들까지도 부러워할 만큼 모든 인간적인 쾌락을 즐겼으며, 마지막으로 그러한 왕의 일생에 어울리게 싸움터에서 용사로서 죽어간다. 나는 이제 의기양양하게 나의 친우들과 형제들이 먼저 가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스와르가로 떠난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추구했던 것들을 잃고 도리어 모든 크샤트리아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기 위해 여기 하계에 남게 되었다. 내가 다리가 없이 이 들판에 누워 있으니 비마가 내 머리를 밟은 정도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곧 까마귀나 독수리들이 내 머리에 앉을 것이거늘."

 

 두료다나가 이렇게 말하자 하늘에서 신들은 그에게 소나기처럼 꽃을 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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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눈먼 자들의 도시'에 이은 후속작인 눈뜬 자들의 도시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가 1995년이 최초 발행되었고 눈뜬 자들의 도시가 2004년에 발행 되었으니 거의 10년에 가까운 공백기가 있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이나 작가의 심경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전편은 눈먼 자들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이 처참하다 못해 바닥에 떨어진 모습을 그려내면서도 약간의 희망을 품고 있다면 이번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멀쩡히 눈을 뜨고 있고 사람들도 꽤나 행복해 보이지만 오히려 희망이 없어 보인다.

 

 '눈먼 자들의 도시' 표지가 흰색인데 반해 '눈뜬 자들의 도시'가 오히려 암흑을 상징하는 듯 어두운 검은색인 것도 눈에 뜨는 대목이다. 하지만 문단이 구분없이 지독하게 긴 문체는 여전하다. 과연 눈이 멀었던 자들이 눈을 떳으니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더 밝고 좋은 세상이 었을까? 아니면 아니면 여전히 세상은 어두컴컴한 곳 일까?

 

2. 백지투표

 

 책은 전작의 결말처럼 사람들이 눈을 뜨고 난 뒤 4년 후의 수도의 선거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선거 당일 비가 억수처럼 쏟아진다. 선거관리인들은 과연 사람들이 이 빗속을 뚫고 투표를 하러 올 것인가를 걱정하는데. 염려하는대로 오로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투표를 하기 위해 투표소를 방문한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관리인들은 다른 투표소에도 전화를 돌려보지만 다른 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거인들이 우려하던 와중 점심이 지나고 오후가 되자 어느순가 비가 뚝하고 그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투표소를 향하지 않아 애를 태우는 가운데... 오후 4시가 되자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한다. 줄은 끊임 없이 이어지고 언론사들은 이런 신기한 사태에 대해 사람들에게 왜 4시에 나왔냐고 질문하지만 사람인들은 그런 질문하는 기자를 조롱하거나 그냥 나왔다고 대답한다. 결국 내무부는 투표시간을 두번씩이나 연장하기에 이르고 사람들은 높은 투표율에 만족하는데. 막상 개표를 시작하자 대량의 백지표가 나온다. 기권도 무효표도 아닌 아무런 표기가 없는 백지표가 수도에서만 무더기로 나온다.

 

 정부는 이에 음모를 주장하기도 하고 수도 시민들에게 의무를 다하라는 호소도 하며 다시 투표를 진행한다. 이번에는 날씨도 화창하다. 정부는 음모를 파헤치기위해 곳곳에 첩자를 심어 놓는다. 화창한 날씨 덕분인지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차례차례로 투표를 시작한다. 그렇지만 결과는... 지난번보다 더 많은 수의 백지 투표였다.

 

3. 정부

 

 이번 책의 주요 시선은 정부 관료들에게로 향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잠깐 정부 관료들이 등장하여 답답함을 선사하지만 이번은 정도가 굉장히 심하다. 매우 긴 만년체의 문체와 어우러져 읽는 사람의 신경을 갉아 먹는 듯한 기분까지 들게 만든다. 의미 없는 수사들, 또한 의미 없는 단어에 의미에 대한 논쟁, 법과 시민의 권리는 무시된체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말도 안되는 논쟁과 권위주의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함만이 가득하다.

 

 정부는 사람들이 눈이 멀었을 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뜬 후, 시민들이 그저 권리를 행사 하였을 뿐이지만 그들을 탄압하고 찍어 누르려고만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최초의 눈먼 자들을 정신병에 가두고 격리시켜버렸던 것처럼 수도를 옮기고 수도 시민들을 격리 시켜버린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부는 눈가리고 아웅을 하고 있을 뿐이다.

 

중앙 정부는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곧고 좁은 길로부터 벗어난 수도의 주민에게 돌아온 탕자의 우화에서 배워야 할 숭고한 교훈을 일깨워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정부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뉘우치고 완전히 회개하면 용서 못할 잘못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방에 모인 것은, 심지어 의회보다도 민주주의의 힘과 권위를 더 훌륭하게 대표하는 이 방에 모인 것은 이 나라를 수백년 래 가장 심각한 위기로부터 구할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라는 점이오.

 

 이 얼마나 오만하고 불손한 말인가. 과연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가 시민을 용서한다는게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4. 시민

 

 대량의 백지투표에 당황한 정부는 시민들 곳곳에 첩자를 파견하고 백지투표가 나온 이유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와 동시에 누가 백지투표를 했는지도 알아내려고 하는데. 일부 시민들을 구금까지 해가며 그 진상을 파악하려고 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시민들은 선거의 4원칙 중 하나인 비밀선거를 들며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밝히기를 거부한다.

 

 정부가 수도에서 물러가고 정부는 큰 혼란을 기대하지만, 사람들은 평온한 일상을 유지한다. 청소 노동자들이 정부측의 사주로 파업을 시작하고 거리 곳곳에 쓰레기가 쌓이자 사람들은 각자의 집 앞을 정리하기 시작하고 수도에 남겨졌던 시장은 사임 후 시민으로 돌아가기까지한다.

 

 정부가 기대했던 혼란으로 인해 수도시민들이 깊은 뉘우침과 함께 정부에 백기 투항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침묵으로 일상으로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규범되지 않은 조직체로써 정부와 맞섰다.

 

5. 경정과 의사의 아내

 

 지난번 책에서 중요한 역활을 했던 의사의 아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쯤에나 모습을 비추었다. 경정은 의사의 아내를 선동자로 몰기 위한 증거를 찾기 위해 경사, 경감과 함께 수도로 파견된다. 경정은 증거를 찾는 과정에서 깊은 자괴감과 더불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경정은 결국 마음을 바꾸어 정부의 계획에 맞서기로 한다. 그렇지만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데. 이 과정에서 저자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개인의 양심으로 정의를 이룩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고 보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부터 개인의 한계는 계속해서 드러난다.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의 아내 역시 소수의 사람만 구해냈을 뿐 인류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과연 그들을 구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신들 둘이 정말로 서로를 필요로 할 거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 감언이설이나 빠른 승진 약속에 속지마, 이 수사의 결론에 대한 책임은 오직 나 혼자만 지는 거야, 당신들은 진실만 말하면 나를 배반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당신들의 진실이 아닌 진실의 이름으로 나오는 거짓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마.

 서로 도우라고, 경정이 말했다. 그게 내가 당신들한테 바라는 전부야, 요구하는 전부야

  

6. 투표 

 

 과연 투표는 의무일까? 권리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의무이자 권리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투표를 할때 꼭 누군가를 뽑아야 할까? 여기에는 아마 누군가는 최선이 아니라면 차악을 뽑는 것이 선거라고 대답을 할 것이고 투표를 하되 무효표나 백지표를 내는 것도 민심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책에서는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 정부는 수도 시민들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속마음은 집권당의 충실한 지지자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듯하다. 백지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정치인들에게 저항하는 시민들과 이를 탄압하는 정부의 대립을 바라보고 있자면 자못 분노가 솟아 오르는게 사실이다. 그리고 왠지 모를 시민들에 대한 동정심과 더불어 백지투표의 정당성에 대해 동조하고 싶어지는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책의 결말을 보고 책의 내용을 곰곰히 곱씹어 보자면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눈이 멀었던 시절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수도 시민들에게 누군가에 의해 눈이 멀었다고 비난을 한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눈이 멀었는게 아니라 눈을 감았다. 누군가에게 속았던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욱 최악으로 알면서 외면한 것이다. 수도 시민들은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고민을 짊어지고 평화롭게 살고 그들의 정부를 몰아낸 저항이 마치 성공한 듯 묘사된다. 그렇지만 그들의 소극적인 저항 아니 평화적인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해버렸다 그 결과는 책에 결말로 나온다.

 

 그 중 하나는 그들이 지지 하지 않았던 총리가 모든 장관직을 독점하는 독재이다.

어쩌면 여러분은 권위주의 통치 시절에 하던 것처럼, 모진 독재의 시절에 하던 것처럼 반역에 나설지 모릅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과거와 똑같은 폭력에 진압 당할 것 입니다.

 그렇지만 반역 덕분에 민주주의가 찾아왔다. 누군가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났다. 책 속 수도시민들의 저항은 완전히 실패일지도 모르겠다.

 

개가 달려 나와 코를 킁킁거리며 여주인의 얼굴을 핥더니, 목을 뻗어 무시무시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낸다. 또 한반의 총소리가 그 소리를 없앤다. 그러자 한 눈먼 남자가 물었다, 무슨 소리 들었나.총소리가 세 발 들렸는데, 다른 눈먼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개가 우는 소리도 들리던데. 지금은 그쳤어, 세 번째 총 소리 때문일 거야. 잘 됐군,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

 오래도록 음미했던 대목이다. 과연 우리는 개 짖는 소리가 싫다고 그 소리를 없애준 총소리에 감사를 해야 하는 것일까?

 

 모두가 권리 위에 잠자지 말기를 최소한의 의무이자 최고의 권리인 투표에 참여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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