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 라는 매우 도발적인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뒤, 당시로서 굉장히 앞선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 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어떻게 인류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인 히틀러가 쿠데타와 같은 불법적인 방법이 아닌 헌법을 위배하지 않는 정당한 방법으로 민주주의 체계에 정점에 올라설 수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책에도 잘 설명되어 있지만 책을 읽기전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 알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세계 1차 대전 막바지에 수립되 나치 독일이 수립되기 전까지 독일의 비공식 지명이었다.

 

 민주제 연방국이었으며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혼합한 형태를 취했다.

 

 거기에 더해 민의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도록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으며 헌법상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되는 등 당시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난한 자들에게는 투표권 조차 부여되지 않았던 시대적 배경에 비춰봤을 때 상당히 앞선 민주주의 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국가에서 대체 무슨일이 벌어졌던 걸까?

 

 공화국은 수립 직후부터 극심한 혼란을 겪게된다. 1차 세계대전에 패한 후 연합군과 체결한 베르사유 조약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남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발행 된 국채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초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경제학 교재에도 자주 언급 되는 이 초인플레이션과 베르사유 조약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고, 정부는 좌익과 우익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이 후, 각종 개혁과 외교적 노력이 성공함으로써 공화국에 안정이 찾아오는 듯 했으나 왕정 복고파인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경제 대공황이 발생하며 다시금 상황을 악화시킨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연이어 대통령 비상대권을 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합법적인 독재를 이어나가는 동안 바이마르 공화국은 극심한 분열로 치닫는다.

 

 이 과정에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며 준군사조직이나 마찬가지인 돌격대나 철모단 등의 행동은 요즘의 팬덤 정치는 아이들 소꿉장난으로 느껴지게 할 정도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까지 저지른다. 이런 폭력적인 행위들이 사회적으로 서서히 묵인 됨으로써 종국에는 국가에 의한 폭력까지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저자는 서술한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민주당 등의 좌파는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히틀러를 이용하기 위해 권력을 준 우파 정치인들은 히틀러를 통제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런 극심한 혼란과 분열 속에서 힘을 키운 나치와 히틀러는 그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권력을 차지하고 스스로 총통의 자리에 올라 바이마르 공화국과 그들이 수립했던 민주주의를 끝장낸다.

 

 '역사는 반복된다' 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극심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유럽에서는 극우주의 정당들이 다시 주류 정당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 대통령 선거가 끝난 우리나라 역시 분열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었다.

 

 종교적, 정치적, 사상적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견 대립과 이로 인한 분열은 필연적 일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빠른 속도와 과감한 추진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극심한 분열만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환멸을 느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그러나 국민이 그런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권리를 포기 할 때, 정치가 민주주의의 기본인 타협을 포기하고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할 때,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문장

 '폭력이 점점 일상이 되면서 국민들은 훗날 나치가 저지르는 국가 폭력도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보수주의 정치인들은 그들 입맛에 맞는 조건으로 권력을 유지할 방법으로 나치를 끌어 들였다. 히틀러 정권은 그 결과였다.'

 '만약 나치의 약속이 합리적이라고 믿어야 나치 당원이 될 수 있었다면 아무도 나치 당원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각자 문제를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다.'

 

 

반응형
반응형

1. 들어가며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평하고 많은 국가들의 정치 체제인 민주주의 원형, 그리고 여러 저작물과 영상물로 직접적으로 표현되거나 영감을 주는 그리스 신화와 일리아드와 같은 고전 작품까지 그리스가 서양사와 현재 세계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필생의 역작이라는 15권에 이르는 로마인 이야기는 다른 나라에서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마치 한편의 소설을 써내 듯 역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저자의 필력은 그녀의 역사관이 편향 되었건, 능력있는 독재자를 사랑하던 간에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저자의 장점과 단점이 유감 없이 발휘가 된다. 책은 한번 잡고 읽기 시작하면 놓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거대한 스케일의 전쟁 상황에서 인간의 모습과 모순을 집어내고 과감하고 결단력있는 개인을 매력적으로 풀이하고 그에 반대하는 인간을 거의 나락으로 몰아 붙여 대비시킴으로써 매력도를 극대화 시킨다.

 

2. 책의 내용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성향이 드러난다. 각 권마다 그 시대의 세계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전쟁과 인물이 중심이되어 이야기가 이어진다.

 

 먼저 1권의 시작은 일단 영화 300으로 우리에게도 꽤나 친숙한 나라인 스파르타로 시작한다. 그저 스파르타식 훈련 등으로 기억되는 혹독한 전사의 나라 이미지가 있는 스파르타는 의외로 권력 분립이 상당히 된 구조였다. 다만 그 구조가 바뀌지 않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어지다보니 삐걱되며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또다른 그리스의 대표도시 아테네가 나오고 그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라는 것을 이룩하고 몰락을 했는지(몰락은 2권이 되서야 나온다.)에 대해서 서술한다.

 

 1권은 거대 제국인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을 다룬다. 유명한 마라톤 전투, 300의 무대가되는 테르모필레 전투, 살라미스해전과 페르시아를 완전히 몰아낸 플라타이아이 전투까지를 다루고 이 전쟁 이후 델로스동맹 성립과 아테네와 피레우스의 일체화 작업 등을 통해 번영하는 아테네의 모습을 다룬다.

 

 2권의 전반부는 번영기의 아테네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후반기에는 펠레포네소스 전쟁이 시작되며 벌어지는 그리스의 몰락을 다루고 있는데 삼국지 연의의 거의 마지막 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제갈량이 북벌을 벌이다가 병사 후 모습을 연상시킨다. 능력이 있으나 운이 없어 재능을 꽃피우기도 전에 좌절을 하거나 민중에게 버림을 받고 능력은 없지만 그저 말빨이 좋아 사람들을 휘두르고 다니다가 오히려 분란을 키울 뿐인 사람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3권은 아마 누구나 아는 마케도니아의 그 유명한 영웅 알렉산더가 등장한다. 로마인 이야기의 카이사르 이후 그녀의 판타지를 가장 충족시키는 인물 중 한명인 것 같다.

 

3. 마치며

 

 책을 읽다보며 느낀 것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촉발시키고 이룬 것은 그 민주주의의 주권자들이 아니라 능력있는 개인들로 묘사가 된다. 솔론의 개혁,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 시대,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까지 소위 지배층이 주도한 권력의 분배는 왕을 단두대에 매달았던 프랑스의 시민혁명의 이미지와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저자의 쓴 책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평가하기에는 나의 지식이 부족하여 무리다. 그러나 책이 재미있고 잘 읽힌다는 이유로 그 저자의 역사관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굉장한 위험한 생각이다. 이 책은 다큐가 아니니 모든 것을 진실로 받아 들이지는 말자

반응형
반응형

 

1. 들어가며

 

 개인적으로는 주연 배우들 몇명 나오는 포스터보다는 이 포스터가 내가 영화를 보고난 감상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위의 포스터를 썻다.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변명치고는 너무 무성의하다 싶을 정도의 변명으로 국민을 기만혀 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기반으로 한 김윤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강동원, 짧게 나오기는 하지만 여진구까지 출연진의 면면히 화려하기 그지 없고 얼마전 5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화제를 끌고 있는 영화이다. 개인적으로는 작년에 나온 택시운전사 보다 더 재미있고 뜻 깊게 봤던 것 같다.

 

2. 내 마음대로 생각해보는 Keyword

 

 민주주의는 한 개인의 영웅적 행동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가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 가장 처음 든 생각이 저것이었다. 영화는 특히나 민주화 진영쪽에서는 정말 많은 주연급 배우들이 출연한다. 다른 영화라면 스토리의 대부분을 이끌어 가고도 남을 이름 값들을 하는 인물들이지만 영화에서는 그 역활이 한정되어 있다.

 

 공안부장 검사역으로 출연했던 하정우의 예를 들어보자. 권력형 비리가 등장하고 검사가 주인공인 영화의 스토리는 큰틀에서 비슷비슷하다. 정의감에 휩쌓인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악이든 깡이든 아무튼 어떤 이유를 가진 검사가 권력형 비를 발견하고 열심히 물고 뜯어 비리를 파헤치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한다. 뭐 그 와중에 조력자가 있긴 하지만 결국은 그 권력자를 끌어내리는 것은 소수의 영웅적인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영화 1987에서는 하정우의 역할은 명확하게 제한되어 있다. 법대로 하자는 소신인지 아니면 정말 투철한 정의감인지, 그것도 아니면 지난번에 까인 것에 대한 복수인지 모를 모호한 이유로(데모를 하는 학생을 서류로 때리는 것보면...) 시체보존 및 시체부검 명령서 (자신이 부장검사로써 할 수 있는 최선) 를 발부하고 시행하는 것 까지 마치고 짤린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슬쩍 동아일보 기자인 윤상삼 기자 (이희준) 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마친다.

 

 그 후, 일이 잘 못되고 전두환이 호헌 선언을 하자 그가 보인 행동이라고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소주 한병까고 재판에 참석해야 한다는 동료의 말에 안 간다고 소리치는게 전부인 평범한 사람이다.

 

 나머지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행위의 동기나 행위를 짚어보자면(물론 의로운 행동이고 아무나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초인적인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김정남과(설경구) 과 감옥의 갇힌 해직 동아일보의 정보를 연결시키주던 한병용(유해진) 역시 가족을 건 협박 앞에서 김정남의 은신처를 밝히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이런 위기의 상황속에서 그 사람을 구해준 것은 서로의 행위 이다.

 

 한병용이 끌려가자 연희(김태리)는 그가 부탁했던 서류를 전달하고 그 서류는 김정남의 위기의 원인이 되지만 함세웅 신부에 의해 발표 되고 기자들에 의해 전파가 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준다.

 

 

 독재는 혼자다.

 

 그 역할이 골고루 분배되어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민주진영과 달리 영화에서 독재정권을 대표해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인물은 박처장(김윤석) 이다. 그는 대통령은 바뀌어도 남영동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부하들에게는 절대적인 충성을 받고 자신의 지위보다 높은 권력을 휘두를 정도의 인물로 묘사된다.

 

이곳에 속한 이들은 민주화 진영에 속한 이들과 다르게 구원을 스스로의 손으로 이루어 내려고 한다. 조반장(박희순)이 구속을 당하자 박처장이 구해주지만 구속이 이어지자 결국은 그를 협박하기에 이르고 거기에 속한 이들도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주는 동앗줄이 아니라 목을 노린다. 그들에게 우리란 결국 좋을 때 우리 일 뿐이지 일이 틀어지면 우리가 아니라 몸통과 꼬리일 뿐이다.

 

 'OO답게' 의 의미

 

 영화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의 행위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은 OO답게 이다. 공안부장 역의 하정우는 검사답게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것이아니라 법을 수호하고 집행하는 일을 한다. 윤상삼 기자와 그의 동료들은 기자답게 보도지침 따위는 무시하고 사실을 밝히고 그것을 전파한다. 이한열(강동원) 은 인간다운 이유로 데모에 참석한다고 밝힌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라는 이유를 든다.

 

 이게 참 또 복잡한 문제인것 같다. 연희가 데모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도 참 인간다운 이유다. 두려움. 박처장이 그렇게 빨갱이를 싫어하고 때려잡는 것도 인간다운 이유다. 복수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국민과 국가에 충성을 하지 않고 박처장 같은 개인에게 충성을하며 무력을 휘두르는 것은 전혀 군인 답지 않은 행동이다.

 

 그날이 올까?

 

 영화에서 막바지에 종을 뎅뎅 울린다. 그날이 왔다. 물고문을 당하고 억울하게 한 청년이 죽고, 그날은 오지 않는다고 포기하라고 외치던 연희가 삼촌 한병용을 위해 서류를 전달하고 마음이 너무 아파서 데모에 참석한다던 청년이 죽고 서야 그날이 왔다.

 

3. 마치며

 

 우리는 얼마 전, 민주주의는 영웅적인 개인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 개개인이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눈으로 목도했다. 물론 따로 떨어져 있던 그들을 하나로 묶어 줄 촉매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그들을 이끌어 줄 사람도 필요한 것이 현실적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고 이루는 것은 한 두사람의 몫이 아닌 사회 구성원 모두의 몫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간접 민주주의라고 너무 국회의원이랑 대통령에게만 맡기고 놀진 말자.

 

 그리 여담으로 강동원이 마스크 깔 때 여자들의 탄성은 마치 예전 '늑대의 유혹' 에서 빗속에서 우산을 까는 시절을 연상시켜 영화관에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넘쳤다. 분명 원래의 사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영화였지만 그 속에서도 스토리와 위트가 살아 있는 것 같아 좋은 영화였다.

반응형
반응형

 

1. 들어가며

 

 '눈먼 자들의 도시'에 이은 후속작인 눈뜬 자들의 도시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가 1995년이 최초 발행되었고 눈뜬 자들의 도시가 2004년에 발행 되었으니 거의 10년에 가까운 공백기가 있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이나 작가의 심경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전편은 눈먼 자들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이 처참하다 못해 바닥에 떨어진 모습을 그려내면서도 약간의 희망을 품고 있다면 이번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멀쩡히 눈을 뜨고 있고 사람들도 꽤나 행복해 보이지만 오히려 희망이 없어 보인다.

 

 '눈먼 자들의 도시' 표지가 흰색인데 반해 '눈뜬 자들의 도시'가 오히려 암흑을 상징하는 듯 어두운 검은색인 것도 눈에 뜨는 대목이다. 하지만 문단이 구분없이 지독하게 긴 문체는 여전하다. 과연 눈이 멀었던 자들이 눈을 떳으니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더 밝고 좋은 세상이 었을까? 아니면 아니면 여전히 세상은 어두컴컴한 곳 일까?

 

2. 백지투표

 

 책은 전작의 결말처럼 사람들이 눈을 뜨고 난 뒤 4년 후의 수도의 선거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선거 당일 비가 억수처럼 쏟아진다. 선거관리인들은 과연 사람들이 이 빗속을 뚫고 투표를 하러 올 것인가를 걱정하는데. 염려하는대로 오로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투표를 하기 위해 투표소를 방문한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관리인들은 다른 투표소에도 전화를 돌려보지만 다른 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거인들이 우려하던 와중 점심이 지나고 오후가 되자 어느순가 비가 뚝하고 그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투표소를 향하지 않아 애를 태우는 가운데... 오후 4시가 되자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한다. 줄은 끊임 없이 이어지고 언론사들은 이런 신기한 사태에 대해 사람들에게 왜 4시에 나왔냐고 질문하지만 사람인들은 그런 질문하는 기자를 조롱하거나 그냥 나왔다고 대답한다. 결국 내무부는 투표시간을 두번씩이나 연장하기에 이르고 사람들은 높은 투표율에 만족하는데. 막상 개표를 시작하자 대량의 백지표가 나온다. 기권도 무효표도 아닌 아무런 표기가 없는 백지표가 수도에서만 무더기로 나온다.

 

 정부는 이에 음모를 주장하기도 하고 수도 시민들에게 의무를 다하라는 호소도 하며 다시 투표를 진행한다. 이번에는 날씨도 화창하다. 정부는 음모를 파헤치기위해 곳곳에 첩자를 심어 놓는다. 화창한 날씨 덕분인지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차례차례로 투표를 시작한다. 그렇지만 결과는... 지난번보다 더 많은 수의 백지 투표였다.

 

3. 정부

 

 이번 책의 주요 시선은 정부 관료들에게로 향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잠깐 정부 관료들이 등장하여 답답함을 선사하지만 이번은 정도가 굉장히 심하다. 매우 긴 만년체의 문체와 어우러져 읽는 사람의 신경을 갉아 먹는 듯한 기분까지 들게 만든다. 의미 없는 수사들, 또한 의미 없는 단어에 의미에 대한 논쟁, 법과 시민의 권리는 무시된체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말도 안되는 논쟁과 권위주의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함만이 가득하다.

 

 정부는 사람들이 눈이 멀었을 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뜬 후, 시민들이 그저 권리를 행사 하였을 뿐이지만 그들을 탄압하고 찍어 누르려고만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최초의 눈먼 자들을 정신병에 가두고 격리시켜버렸던 것처럼 수도를 옮기고 수도 시민들을 격리 시켜버린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부는 눈가리고 아웅을 하고 있을 뿐이다.

 

중앙 정부는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곧고 좁은 길로부터 벗어난 수도의 주민에게 돌아온 탕자의 우화에서 배워야 할 숭고한 교훈을 일깨워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정부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뉘우치고 완전히 회개하면 용서 못할 잘못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방에 모인 것은, 심지어 의회보다도 민주주의의 힘과 권위를 더 훌륭하게 대표하는 이 방에 모인 것은 이 나라를 수백년 래 가장 심각한 위기로부터 구할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라는 점이오.

 

 이 얼마나 오만하고 불손한 말인가. 과연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가 시민을 용서한다는게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4. 시민

 

 대량의 백지투표에 당황한 정부는 시민들 곳곳에 첩자를 파견하고 백지투표가 나온 이유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와 동시에 누가 백지투표를 했는지도 알아내려고 하는데. 일부 시민들을 구금까지 해가며 그 진상을 파악하려고 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시민들은 선거의 4원칙 중 하나인 비밀선거를 들며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밝히기를 거부한다.

 

 정부가 수도에서 물러가고 정부는 큰 혼란을 기대하지만, 사람들은 평온한 일상을 유지한다. 청소 노동자들이 정부측의 사주로 파업을 시작하고 거리 곳곳에 쓰레기가 쌓이자 사람들은 각자의 집 앞을 정리하기 시작하고 수도에 남겨졌던 시장은 사임 후 시민으로 돌아가기까지한다.

 

 정부가 기대했던 혼란으로 인해 수도시민들이 깊은 뉘우침과 함께 정부에 백기 투항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침묵으로 일상으로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규범되지 않은 조직체로써 정부와 맞섰다.

 

5. 경정과 의사의 아내

 

 지난번 책에서 중요한 역활을 했던 의사의 아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쯤에나 모습을 비추었다. 경정은 의사의 아내를 선동자로 몰기 위한 증거를 찾기 위해 경사, 경감과 함께 수도로 파견된다. 경정은 증거를 찾는 과정에서 깊은 자괴감과 더불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경정은 결국 마음을 바꾸어 정부의 계획에 맞서기로 한다. 그렇지만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데. 이 과정에서 저자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개인의 양심으로 정의를 이룩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고 보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부터 개인의 한계는 계속해서 드러난다.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의 아내 역시 소수의 사람만 구해냈을 뿐 인류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과연 그들을 구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신들 둘이 정말로 서로를 필요로 할 거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 감언이설이나 빠른 승진 약속에 속지마, 이 수사의 결론에 대한 책임은 오직 나 혼자만 지는 거야, 당신들은 진실만 말하면 나를 배반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당신들의 진실이 아닌 진실의 이름으로 나오는 거짓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마.

 서로 도우라고, 경정이 말했다. 그게 내가 당신들한테 바라는 전부야, 요구하는 전부야

  

6. 투표 

 

 과연 투표는 의무일까? 권리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의무이자 권리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투표를 할때 꼭 누군가를 뽑아야 할까? 여기에는 아마 누군가는 최선이 아니라면 차악을 뽑는 것이 선거라고 대답을 할 것이고 투표를 하되 무효표나 백지표를 내는 것도 민심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책에서는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 정부는 수도 시민들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속마음은 집권당의 충실한 지지자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듯하다. 백지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정치인들에게 저항하는 시민들과 이를 탄압하는 정부의 대립을 바라보고 있자면 자못 분노가 솟아 오르는게 사실이다. 그리고 왠지 모를 시민들에 대한 동정심과 더불어 백지투표의 정당성에 대해 동조하고 싶어지는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책의 결말을 보고 책의 내용을 곰곰히 곱씹어 보자면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눈이 멀었던 시절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수도 시민들에게 누군가에 의해 눈이 멀었다고 비난을 한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눈이 멀었는게 아니라 눈을 감았다. 누군가에게 속았던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욱 최악으로 알면서 외면한 것이다. 수도 시민들은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고민을 짊어지고 평화롭게 살고 그들의 정부를 몰아낸 저항이 마치 성공한 듯 묘사된다. 그렇지만 그들의 소극적인 저항 아니 평화적인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해버렸다 그 결과는 책에 결말로 나온다.

 

 그 중 하나는 그들이 지지 하지 않았던 총리가 모든 장관직을 독점하는 독재이다.

어쩌면 여러분은 권위주의 통치 시절에 하던 것처럼, 모진 독재의 시절에 하던 것처럼 반역에 나설지 모릅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과거와 똑같은 폭력에 진압 당할 것 입니다.

 그렇지만 반역 덕분에 민주주의가 찾아왔다. 누군가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났다. 책 속 수도시민들의 저항은 완전히 실패일지도 모르겠다.

 

개가 달려 나와 코를 킁킁거리며 여주인의 얼굴을 핥더니, 목을 뻗어 무시무시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낸다. 또 한반의 총소리가 그 소리를 없앤다. 그러자 한 눈먼 남자가 물었다, 무슨 소리 들었나.총소리가 세 발 들렸는데, 다른 눈먼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개가 우는 소리도 들리던데. 지금은 그쳤어, 세 번째 총 소리 때문일 거야. 잘 됐군,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싫어.

 오래도록 음미했던 대목이다. 과연 우리는 개 짖는 소리가 싫다고 그 소리를 없애준 총소리에 감사를 해야 하는 것일까?

 

 모두가 권리 위에 잠자지 말기를 최소한의 의무이자 최고의 권리인 투표에 참여하기를 기원한다.

반응형
반응형

 

1. 들어가며

 

 사실 책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들었던 생각은 대체 요즘 같이 인터넷이 발달하여 집단지성이라는 것이 손 쉽게 이루어지고 A.I가 발달하는, 전문가의 권위가 그 어느 때 보다도 약해졌다고 여겨지는 지금 무슨 전문가의 독재 타령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이 몸의 어딘가가 눈에 띄지 않게 아픈 일이 생기면 초록창에 지식인을 먼저 찾는지 의사를 먼저 찾아가는지 생각해보자, 최순실 사태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이들은 전문가들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던 일반인들 이었다.)

 

 그렇지만 굳이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책 띠지에 적힌 내용, "중국의 덩샤오핑, 한국의 박정희, 싱가포르의 리콴유, 국가의 고도성장은 독재자의 능력 덕분인가?" 라는 말과 부제처럼 붙어있는 '경제학자, 독재자 그리고 빈다들의 잊힌권리' 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그 시기에 우리나라가 성장했던 이유는 다분히 골디락스라 일컬어지는 당시 국제시장의 상황, 그리고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노력과 국가적으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수탈에 의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당시가 살기 좋았다고 추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소위 추억보정에다가(아니 다들 젊었을 적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엄청난 성장시기에 사회의 최하층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콩고물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테크노라트적 환상은 빈곤이 전문적인 능력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결과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빈곤은 실제로 권리의 부족에서 비로소디는 문제이다."

 

2. 빈 서판 vs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과연 우리가 한 국가 혹은 민족의 발전을 논할 때, 그 국가의 역사를 무시한채 빈 서판에 글을 쓰듯이 좋은 제도, 좋은 기술 등 소위 그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선진화 되고 앞선 것들을 도입하면 그 국가가 자동적으로 발전 할 수 있을까?

 사실 이 개념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관리관점과 인종적 관점이 적용된 이야기이다. 유럽열강들의 지배를 받던 아프리카에 식민지들에게 적용된 개념이었는데. 그들의 삶과 정신은 미개하기 짝이 없어 지배자인 제국들이 새로운 제도 등의 도입을 통해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과론 적으로만 봤을 때, 그 것은 대 실패였는데, 아프리카 내부적으로 수 많은 사항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것에 관한 논쟁은 우리나라 내부적으로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개화기에 갑오개혁이나 중국에서도 변법자강운동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바뀌지 않고 단 시간에 제도와 문물한 도입하려 했던 시도는 대부분 실패였다. (특이하게 성공한 메이지 유신이 있기는 했지만서도...)

 

"식민지의 역사적 사례를 보면, 테크로라트적 해법을 중시했으며 그에 동반하여 식민지 독재자가 행하는 권리 침해를 무시 했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3. 국가인가 vs 개인인가

 

 저렇게 소 제목을 적고나니 언듯보기에는 전체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를 비교하는 것 마냥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국가에도 개인에 대한 권리 침해가 생각보다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국가의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기도 하는데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일까?

 

 가끔 국가를 위해 때로는 희생할 줄 도 알아야 한다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이민을 떠나는 이들에게 배신자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란 우리에게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인가?

 

"계획은 개인들이 따를 때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계획자들은 개인의 권리를 허용 할 수 없다."

 

"개인의 발전보다 나라의 발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망각하는 또하나의 잘못된 비극적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4. 테크노라트(전문가 관료집단) vs 시장(문제해결자 들의 연합)

 

 이건 생각보다 흔한 논쟁이다. 과연 전문화된 관료집단이 국가의 발전을 이끌 수 있을까? 이 부분은 특히나 독재시대때의 발전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우리나라 국민들이 많이 기대하는 것 같다. 대통령이나 다른 어떤 특출난 인물이 이끌어서 발전하는 신화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미 사회는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전문가는 어느 특정분야에 대해서만 남들 보다 많이 알뿐이다. 그 전문가가 많이 모여있다고 해봤자 속속들이 잘 알 수는 없는 법이다. (회사의 부장님이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사원이 처리하는 일의 속사정과 미세하게 변하는 일들을 속속들이 알아기는 어려운 법이다.)

 

 "의도적인 설계자들이 더욱 알기 어려운 것은 묵시적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한 사람이 해당 내용을 상세히 적어 설명하더라도 좀 처럼 알아듣기 어렵다. 우리가 사회를 경영하기 위해 중앙 집중적인 전문지식에 의존 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대 필요한 광대한 지식에 비해서 각 개인이 아는 것은 너무 작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가운데 누가 가장 잘 아는지도 좀 처럼 잘 모른다."

 

5. 인자한 독재자의 허상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인자한 독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살고 있다. 특별한 카리스마로 좌중을 휘어잡고 국가를 단합시키고 한 점에 에너지를 쏟아 국가를 끌고나가는 모습, 그로인한 경제성장 속에서 열광하는 민중들의 모습, 그렇지만 지도자는 자신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고 검소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인자한 독재자의 모습이 아닐까? (이야 이거 완전 히틀러 아니냐...?)

 

 이러한 환상은 독재를 겪지 않은 국가에서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나타는 이유를 사람들의 심리적 편향에서 찾고 있다. 세상에는 성공한 독재자들 보다는 실패한 독재자가 훨씬 많다 그렇지만 우리가 리콴유 등 성공한 독재자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성공한 것을 기억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심리적 편향과 언론 때문이라고 말한다. (주변에 주식이 실패했다고 하는 인물을 찾아보자 그리고 성공했다고 떠는 인물들은 찾아보자..)

 

 그리고 우리가 흔히 국가 성장의 지표라고 말하는 GDP 이것역이 신뢰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독재국가에서 굳이 통계에 힘쓸 필요도 없을 뿐더러 조작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이 연설에도 말했듯이 우리가 사람을 죽이는 총을 생산해도 범죄자를 가두는 감옥을 만들고 거기에 거는 자물쇠를 만들어도 우리의 GDP는 올라간다.

 

"독재는 집단주의적 가치를 영속시키고, 자유로운 도시와 국가는 개인주의적 가치를 영속 시킨다."

 

"독재는 집단주의적 가치를 키워주고, 집단주의적 가치는 독재를 키워준다. 독재의 역사를 가진 지역들에서는 서로를 신뢰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가치관이 매우 낮게 나타난다."

 

6. 마치며

 

 책은 어떻게 보면 아미타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 책은 소수집단(테크노라트) 혹은 개인이 권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이 지배하면서 내세우는 명분인 발전이라는 것의 허상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개인에 대한 특히나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에대한 권리 침해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이야기 하고 있다.

 

 책을 요약해서 쓰다보니 오해가 생길까 싶어 다시하는 말이지만 이 책은 소위 시장만능주의나 신자유주의를 옹호 하는 책이 아니다. 국가는 늘 실패를 하니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발전이라는 명목 혹은 이상 아래서 이루어지는 개인 권리에 대한 부당한 침해에 굴복하지 말라는 소수의 집단과 권력자들에게 우리의 권리를 모두 맡겨두지 진정한 민주주의를 옹호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잊지말자 그들이 주인이 아니다 우리가 주인이다.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권리를 아우르는 통합적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의 권리는 민간 및 정부의 공급자 모두가 그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힘이다."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은 시장의 시험도 민주적 제도의 시험도 치르지 않는 행위자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다."

 

"이제는 오래도록 이루어지지 못한 논쟁을 벌여야 할 때다. 부자와 빈자의 불평등한 권리에 대한 침묵을 이제 끝내야 할 때다. 모든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자유를 누려야 할 때다."

반응형
반응형

 

1. 들어가며

 

 2017년 새해가 밝은 지도 어느 덧 한달이라는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설날의 흥겨움과 새해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하 있어야 할 나라는 여전히 상상 이상으로 개판이다. 민주주의를 망쳐 놓은 인간이 언론을 향해 마치 민주 열사처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끝장났다고 외치고 있고 썩었을 꺼라고 예상만 하고 있던 곳은 그 속살을 훤히 들어내며 썩은 냄새를 나라 전체에 뿌리고 있다.

 

 현직 대통령의 탄핵에 대해 헌재에서 어떠한 판결을 내놓든 대통령의 정상적인 국정 운영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거기다 미국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세계 정세가 점점 혼돈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각종 언론조사에서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로 추정되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가 대담집을 내놓았다. 책은 곧 베스트셀러에 등극했고 그가 사인회를 하러 가는 곳에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패배를 했고 당내에서는 그를 친노 패권주의의 수호자 처럼 표현하고 청산해야할 구태 정치인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정말 여기저기서 수도 없이 까이고 또 까였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보여지듯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 과연 사람들은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그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책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2. 책의 내용

 

  책은 대담 형태로 이루어져있다. 소설가 문형렬씨가 문재인 전 대표의 어린시절부터 현재의 각종 이슈사항(정치, 외교, 사드 등등)에 대한 의견 및 향후 그가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대한민국에 대해서 묻고 대답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 직문직답 형식의 짧은 질문들도 존재한다.

 

 책의 주요 내용은 어쩌면 굉장히 요약하기 쉽다. 읽기 쉽게 마지막 목차에 간략하게 요약정리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책을 읽을 시간은 없는데 책의 내용을 대략적으로라도 알고 싶다면 서점 같은 곳에 가서 마지막 부분만 봐도 될 것이다. 그래서 글에서는 간략하게 책에서 인상깊었던 부분만 정리해보겠다.

 

국민으로부터 위임 받은 권력이 '공정함'을 이루도록 하는게 우리 사회이 부패를 청소하는 출발점이죠.

 

이들에게 혁명이 총칼처럼 아주 폭력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주권자 혁명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적 혁명입니다. 

 

헌법에는 권력이라는 말이 딱 한번 나옵니다. 우리가 권력이라는 말을 쓰고 특히 공권력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헌법에는 권력이라는 말이 단 한번 나와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다음 나머지는 '권한'에 대한 겁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 및 입법부에서 일하는 국회의원들은 다들 국민들에 의해서 선출된 선출직들이다. 그런데 일부 정치인들은 투표가 끝나고 나면 그들이 선출직이 아니라 국민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로 착각하는 것 같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권한을 잠시 위임한 것이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넘긴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국민이 원한다면 언제나 그 권한을 회수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 혁명은 폭력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려울 땐, 무조전 원칙적으로

 

 작금의 대한민국을 이 상황까지 몰고 간 것은 어찌보면 원칙없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원칙이 아니라 개인적 이익이었다. 직장 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원칙 없는 상사를 만나면 굉장히 피곤하다. 원리원칙만 너무 따진다면 유연함이 떨어진다고 비난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대신 아랫사람으로써 발생하는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지침이 정확히 서 있는 것과 같다. 회사는 사원들에게 언제나 원칙을 지키라고 설파하고 정도경영이 경영이념인 회사는 발에 채일정도로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어찌하여 회장님들은 그리도 안 지키시는지... 

 

북핵을 해결하려면 국제적으로 제제도 하고 공조로 압박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제제와 압박조차 협상을 위해서 입니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이다. 근 10년 동안 북한에게 대고 으르렁 대기는 했지만 대체 얻은 것이라고는 없다. 천안함은 폭침으로 가라 앉고 개성공단의 철수로 중소기업만 어려워졌다. 거기다 사드를 배치한다고 공포는 해버려서 중국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의 관계는? 또 괜찮나?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다는 위협이나 당하고 FTA는 폐기, 방위비는 올려라고 소리치는 대통령이 들어왔다. 일본과의 관계는 손가락만 아프니 적지 말자. 대체 그 동안 외교로써 얻어 낸 것이 없다. 제대로된 협상이 되지 않았다.

 

3. 맺으며

 

 책에서 정말 기억에 남는 몇가지만 적었다. 책을 읽는 동안 여러가지 많은 생각들을 할 수도 있었고 그가 굉장히 준비된 사람이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인사가 만사' 라는 말이 있다. 리더라면 개인의 뛰어난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그가 이끌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능력도 굉장히 중요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대표로 있을 때 영입한 인재들이 요즘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대통령 선가기 있는 해이다. 탄핵심판 결과에 따라 벗꽃 대선이 있을 수도 있다고 예상되는 상황이다. 누가 되었던 능력과 소신이 있고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이 나라를 다시 정상으로 돌려 놓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많은 유권자들 또한 이러한 것들을 읽고 그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과연 진심인지도 파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4. 추가 (사드 배치에 대한 의견)

 

 이 글에 사드라는 단어가 단 한번 나왔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사드라는 단어와의 매칭으로 이 글을 찾아 들어왔길래 내용을 추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기 대권주자의 사드에 대한 의견을 궁금해하는 것 같습니다.

 

 책에는 문재인 전 대표의 사드에 대한 의견이 명확하게 나와 있으니 일부 옮기겠습니다.

 

 '사드 배치는 다음 정부로 연기하는게 옳다고 본다. 절차상 심각한 문제가 있지 않은가. 다음 정부로 연기하면 이 사드 배치라는 카드로 북한과 적어도 핵폐기, 핵억제, 핵동결 등 다양한 협상을 할 수 있고...(중략)... 중국하고도 공조해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걸 도모 할 수도 있다...(중략)'

 

 

반응형
반응형

 

 경제학에는 여러가지 이론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이론으로는 제임스 뷰캐넌 교수의 '공공선택 이론'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뷰캐넌 교수는 이 이론에서 국가와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 역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 이론은 '이기적인 개인 혹은 기업 vs 공공의 정부' 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증명 해냈습니다.


 이 이론은 정치(의회)와 행정이(정부)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국민의 행복, 정의 기타 등등)과는 달리 글로벌 기업들과 자본가들의 사익을 추구하는 비지니스로 활용되고 있다고 늘 비난하는 촘스키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고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멀어보이지는 않습니다.


 촘스키 교수는 미국의 정부와 정치권이 국민들의 이익과 편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과 금융권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늘 비난하고 있고 이를 위해서 교육과 언론들을 활용하여 민중들을 파편화 시키는 선전을 실시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개똥철학', 즉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며서 그들이 장시간 노동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 타인과의 연대 등과 같은 위험한 생각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요컨데 인간의 가치를 완전히 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왠지 김기춘씨가 썻다는 쪽지의 전략과 비슷합니다.


 주류 경제학의 대전제는 바로 '경제적 인간' 입니다. 그럼 대체 정부와 정치권 놈들이 우리의 이익을 편취하는데 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을까요? 생각해보면 특이한 일입니다. 고대부터 위정자의 숫자보다 백성들의 숫자가 언제나 훨씬 많았습니다. 신대륙에서도 백인 지주들의 숫자들 보다 흑인 노예의 숫자가 많았죠. 그런데 심각한 착취 속에서도 민란이나 혁명은 언제나 거의 꾹꾹 눌러 담았다가 최후의 순간에 터집니다. 왜일까요?


 뷰캐넌 교수는 이를 '합리적 무시'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합리적 무시는 어떤 정보가 주는 이득보다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비용이 클 때 정보를 무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모난돌이 정 맞는다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공공선택이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무임승차 이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촘스키 교수는 대중이 혁명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중이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임승차를 하고 싶지 이 모난 부분이 되어 먼저 정을 맞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죠.


 공공선택 이론으로 봤을 때 이익에 직접적으로 결부되지 않은 일반 대중이 집회나 단체행위에 나서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춰봤을 때 광화문 광장에 수백만의 대중이 모여서 평화롭게 집회를 한 것은 굉장히 놀랄만하고 자랑할만한 일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이양한 권력을 마음대로 팔아 먹었고 최순실은 그것으로 삥을 뜯었죠. 그렇지만 이게 국민 개개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삥 뜯은 것도 아니고 우리의 세금이 빼돌려 지기는 했겠지만 이것도 전국민이 소위 N빵하면 개개인에게는 얼마되지 않는 돈일 가능성이 높고 설령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여 다른 형태로 국민에게 투자를 하더라도 개개인에게는 티도 안나겠죠. 그에 비해 집회에 참여하는 비용은 매우 직접적이죠. 지방이라면 왕복 KTX 차비, 식비, 잠이라도 잔다면 숙박비에 시간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JTBC에서 태블릿PC를 오픈하기전 몇몇 모난돌의 역활을 하던 사람들은 신나게 정으로 까이거나 아예 관심도 받지 못했었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굉장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현재 우리는 역사적으로 굉장한 큰 변곡점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발전과정 중의 하나가 정치에 참여하는 권력자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성골에서 진골로 6두품과 지방호족으로, 그리고 과거로 선발된 관료에게로 말이죠. 이 과정이 일제시대와 독재를 거치면서 일반 대중에게로 내려오다가 어느 시점에인가 멈춰버렸지만 그 시계가 지 다시 돌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촘스키는 민주주의가 최고의 체제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가 현재 그 찬란한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했는데요. 특히나 미국의 민주주의를 '국민이 당사자가 아니라 방관자에 머무는 체제'라고 비난합니다.


 국민은 일정 시간 간격을 두고 자신들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줄 지도자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권리를 행사한 후에는 집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어야 합니다. 주어진 일에 열중하고 벌어들인 돈으로 소비하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요리나 하면서 지내야 합니다. 국가를 성가시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이런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촘스키는 많은 진보적 발전이 있었지만, 그 원동력은 지식인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대중의 결집된 힘, 그리고 조직화된 노동계급이야 말로 진보적 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합니다.


 군도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모이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이다.', 권력자들은 자기들 목에 칼을 들이댈 지도 모를 도적을 두려워 할지언정 나약한 백성은 두려워하지 않는 법입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