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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로 유명한 레이코프의 책이다.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기 보다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도 나왔던 '프레임' 이라는 주제를 대담 형식으로 엮어낸 글이다.

 

 대부분은 사람들은 (나를 포함하여) 어떤 사건이나 누군가의 의견에 대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에서는 단언하다시피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개인적 혹은 문화적 경험을 토대로 마음속에 변별적인 구조를 습득해왔고 대부분의 사고를 무의식적으로 행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은유를 통해 사유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거의 의식조차 못 하죠. 예컨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쉽게 추론하거나 말할 수 없습니다.

 

 다들 문학시간에 한번 쯤, 들어보았을 은유는 영어로는 메타포라고 한다. 의외로 생각지도 못하게 이 메타포란 것이 우리 주변 곳곳에서 사용된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자면 올해 있었던 월드컵과 아시안컵 축구를 떠올려보자. 언론에서는 흔히 축구를 전쟁의 이미지로 은유한다.

 

 수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한 경기장에서 뛰는 것을 빗대어 '별들의 전쟁' 이라 말하고 독일 국가대표팀은 '전차 군단' 브라질 대표팀은 '쌈바 군단' 등 온갖 대표팀의 별칭에 '군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뛰어난 감독에는 '명장'이라는 용어를 붙여 축구장과 각종 승패가 나뉘는 경기를 전쟁으로 은유하고 우리도 쉽게 이를 받아 들여 사용한다.

 

 중, 고등학생 시절 문학 시험문제로 나오면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지만 이처럼 이미 우리 주변에는 은유가 넘쳐난다. 다만 저자의 말대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고 이 은유는 문화권 등에 따라 전혀 상반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책에서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방법도 재미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밤 중 아이가 울 때 안아주면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안아주지 않으면 보수적인 성향으로 묘사한다. 진보는 다정한 어머니의 이미지, 보수는 엄격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준다.

 

 정치권에서는 은유를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생성하고 언론을 이용해 이것들을 강화 해나간다. 프레임은 일종의 생각을 틀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정하긴 하겠지만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사람들은 개인적, 문화적 경험에 기반하여 대부분의 무의식적으로 결정하고 행한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면 혹시 주식이나 펀드 혹은 보험을 들면서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려보자.)

 

 저자는 이런 유권자들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프레임을 생성, 강화하는 언론의 역활을 강조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언론의 말을 그대로 쉽게 받아 들일게 아니라 귀찮더라도 머리를 굴려야 할 것 같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괜히 생긴건 아닌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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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개인적으로 자기계발 서적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모든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 우리시대의 사회적 멘토로 추앙받는 인물들이 쓴 자전적 이야기나 혹은 청년들에게 건내는 충고 또는 위로를 담은 내용의 책들은 매우 싫어하는 편이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나서는 사실 이 책이 왜 자기계발 분야에 분류 해놓았는지는 당최 이해를 못하겠다.

 우리나라의 대표 진보적 학자인 조국교수의 책을 읽을까 말까 굉장히 망설였다. 일단 책 제목부터 시작해서 굉장히 자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출판사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었던 것은 일단 저자의 서문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정치인도, 시민운동가도, 철학자도, 구도자도 아닌 구저 공부하는 사람 학인으로 한정 했기 때문이다. 계속 무언가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가끔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똑똑한 사람은 무언가 알 고 있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감 말이다.

 

2. 책의 내용

 책은 크게 4개의 목차로 나눠져있다.

 

 1. 호모 아카데미우스 - 공부하는 인간

 2. 호모 레지스탕스 - 저항하는 인간

 3. 호모 쥬리디쿠스 - 정의로운 인간

 4. 호모 엠파티쿠스 - 공감하는 인간

 

 일단 이 책은 공부에 대해서 학구적으로 탐구하는 책은 아니니 혹시 그런것을 기대하는 독자는 얼른 다른 책을 알아보는게 좋을 것이다. 저자의 공부에 대한, 사회에 대한, 인간에 대한 개인적 관점 혹은 철학을 담고 있는 책이다.

 책 초반에는 자소서에서 많이 볼 법한 내용이 많이나온다.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나 엄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밑에서... 뭐 이런 내용이 나는 공부가 좋아서 공부를 잘했다. 뭐 이런 내용이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쭉 나온다. 2장부터는 저자 개인의 진보적 성향이 가득 묻어 나오며 어떻게 공부 할 것인지, 우리의 사회는 어떻게 발전해나가야 할지, 개인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분은 독자의 성향에 따라서 굉장히 호불호가 갈릴 수 밖에 없는 내용이니 직접 읽어 보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3. 기억에 남는 문구들 및 감상

 사실 여기에 적는 내용 중 많은 부분을 저자 역시 인용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그를 보고 부르는 차별적 호칭을 거부한다. 그 호칭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나'가 아닌 어떤 부류에 속한 채 자존감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속한 조직이나 직함 등을 확인다. 학생들은 어디 학교를 다니는지 물어보고 직장인이라면 회사명과 하는 일을 물어본다. 물론 그게 꼭 나쁜일이라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그가 속한 조직이나 직함 따위로 그 사람을 먼저 파악하려고 드는게 문제가 아닐까? 내가 다니는 학교 혹은 회사 혹은 기타 조직이 왜 나를 존재를 대변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자로 '사회(社會)'와 '회사(會社)'는 어순만 다르다.

그러나 두 단어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며 또 달라야 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신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와 비슷한 맥락의 말 같다. 과연 무엇이 우선인지 우리는 언제나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요즘 사회는 선후가 바뀐 일이 많은 것 같다. 사회의 발전보다 개별 회사의 발전이 우선 시 되기도 하고 국가의 안전과 발전이라는 명목아래 개인의 권리가 부당하게 억압되기도 한다. 그리고 법에서 허용한다는 이유로 혹은 법률이 없다는 이유로 정의가 무시되기도 하는 사회이다.

 

법의 가식에 대해서는 항상 회의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법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결코 냉소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중용'의 '중'은 '가운데'가 아니라 '정확함'을 뜻한다... 중용은 현실의 부정의와 부당함을 직시하고 그것을 고쳐서 최상·최적의 현실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행동하는 심성과 자세를 뜻한다.

 

우리의 지식은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들었고, 우리의 영리함은 우리를 딱딱하고 불친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생각은 너무 많이 하지만 너무 적게 느낍니다.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냉소적 거리 두기는 투항과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죽은 지성'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말들이다. 가끔 인터넷 상에서는 어려운 용어들을 써가며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나빼고는 다 쓰레기라고 말하는 양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들은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귀찮아서 혹은 나에게 피해가 올까봐라는 이유로 눈을 감고 외면한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와 말이 통하지 않는 다고 단절적인 태도를 취한다.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인가. 진정 자신이 옳은 일이라고 믿는 다면 이성적이고 지적인 상태가 아니라 감성적인 태도로 설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내가 더 많이 알고 그럼으로 내가 옳다고 무조건 믿고 남들을 배척하거나 설득을 포기는 것 역시 양심에 대한 직무유기 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균형감각이란 서로 모순되는 양극단의 중간점에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니다. 야극단 사이를 되풀이하여 오락가락하고, 때로는 한쪽 극단에 가까이 접근하기도 하면서, 문제 해결에 가장 적합한 한 점을 찾아내는 영원한 이동 행위가 아닐까?"

 하퍼리의 '파수꾼'도 이에 대한 이야기를 잘 풀어내고 있으니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파수꾼과 세월호)

 

호모 심비우스, 즉 경쟁일변도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협력하고 공생하는 인간'이라고 한다.

 

 책에서 굉장히 기억남는 내용이다. 얼마전 메리츠자산운용의 존리 대표의 강연을 들은 적이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교육을 이야기를 하면서 호모 심비우스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시험 문제를 남들보다 한 문제라도 더 맞추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같이 공부하는 친구를 경쟁자로 만든다. 협력을 하고 공생을 해야하는 사람이 아니라 밟고 올라서야 할 경쟁자로 만든다. 이는 굉장히 큰문제다. 알파고가 나와서 이세돌을 이겼다. 이것이 현실이다. 왓슨이 미국의 퀴즈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 수능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공부를 해봤자 수능을 제일 잘 푸는 것은 이제 기계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시험 문제를 잘 푸느냐가 중요한 것일까?

 옆의 친구와 얼마나 잘 지내고 그것을 통해 협력하고 공생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포기하지 말고 체념하지 말고,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걸음을 내딛자

 

 책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 내용을 한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게 아닐까? 어설프게 위로하며 이 모든 것은 지나가리가 아니라. 버티고 어떻게든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라... 

 

P.S 그런데 법은 왜 공부하나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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