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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일본 영화다. 동명의 일본 소설도 있지만 영화의 내용은 주로 '덤불 숲' 이라는 작품에서 따왔고 분위기와 일부 내용을 라쇼몽에서 따왔다고 한다.
 
 가끔 소설책이나 영화감독을 인터뷰 한 내용을 보면 '라쇼몽'과 '일곱 사무라이'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나온다. 그래서 대체 무슨 영화길래 그런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나 싶어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영화는 비가 억수 같이 오는 날씨에 부서져 썩어가고 있는 문을 배경으로 시작이된다. 비를 피하는 중인지 왠 나무꾼으로 보이는이와 중이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고 나무꾼은 혼자서 '모르겠다는' 를 중얼중얼 거린다. 그리고 그 때 약간 불량해보이는 사내가 비를 피하기 위해 문 안으로 뛰어들어고 '모르겠어'를 중얼거리는 나무꾼 남자의 이야기에 그가 흥미를 보이며 나무꾼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무꾼 남자는 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무라이 시신을 관청에 신고하고 증인(?) 의 개념으로 재판을 참관하고 중 역시 살아있던 사무라이를 마지막으로 본 인물로 재판에 참석한다. 운이 좋은건지 그 죽은 사무라이를 죽인 범인이 어의 없는 사유로 잡혀들어오고 사무라이의 부인까지 잡혀온다. 그리고 무녀에 의해 죽은 사무라이의 영혼까지 재판에 참석한다. 그리고 각자의 사건에 대한 증언이 시작된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 같은 일에 대해서 우린 각자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한다.

 

 나무꾼이 고민하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도적, 사무라이의 부인, 사무라이까지 모두 같은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악명높은 도적 타죠마루는 사건을 설명하며 자신의 용맹함과 강함을 주장하고 타죠마루에 의해 겁탈당한 사무라이의 아내는 자신의 정절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사무라이의 혼은 타죠마루의 속임수에 패배를하고 아내에게 배신을 당했지만 마음속으로 용서를 하고 배신감과 자괴감 속에 자결을 통해 사무라이로서의 기개를 지켰다고 주장한다.
 
 세 사람 모두 사건에 연루된 상대방의 간악함을 비난하고 당시 시대상 최고로 치부하는 관념을 지켰노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사건을 목격한 나무꾼의 증언 역시 그들과 다르다.
 
 도적 타죠마루의 남자다움에 반한 것 같았던 사무라이의 아내에게 오히려 타죠마루가 무릎을 꿇으며 지극정성으로 구애를 했고, 사무라이의 아내는 정절을 지키며 자결하려고 하기는 커녕 구애를 하는 타죠마루에게 그런건 남자가 알아서 정하라고 말한다. 이에 도적 타죠마루는 사무라이에게 결투를 신청하지만 사무라이는 자결치 않은 아내를 비난하고 그녀를 버린다. 이에 사무라이의 부인은 두 남자 모두 비난하자 도발에 걸려든 이들은 서로 결투를 벌인다.
 
 그런데 타죠마루의 기억속에서 멋지게 검을 주고 받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허공에다 칼질을하고 상대에게 흙을 뿌리고 검을 내팽겨친 채 도망을 가는 등 그야말로 영화가 아닌 현실적인 개싸움을 한다. 결국 타죠마루가 우여곡절 끝에 사무라이를 살해하지만 지친 타죠마루를 내버려 둔 채 사무라이의 부인은 도망간다.
 
 사건의 당사자인 세 사람이 했던 증언과 나무꾼이 목격했던 사건은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 서로 상대의 잘못에 대해서는 마치 사진을 찍은 듯 정확하게 기억을 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교묘히 기억을 왜곡해 저장을 하고 있다. 그건 심지어 죽어서 더 이상 세상에 남길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무라이의 영혼조차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격담을 말하는 나무꾼 역시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을 교묘하게 숨기고 있다.
 
 과연 인간 세상에는 진실은 없는 걸까? 우린 모두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것일까? 영화의 말미에 문 뒤쪽에 버려져 있는 아기가 울고 있고 나무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그네는 아기를 감싸고 있던 비단과 부적을 훔친다. 나무꾼과 중이 남자를 비난하지만 오히려 나그네가 단검을 훔친 나무꾼의 도덕성을 비난한다. 나그네가 떠나가고 나무꾼이 아이를 데리고 떠나려 하자 중은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고 소리치지만 나무꾼은 아이를 키울 것임을 말하자 중은 지옥같은 세상 속에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말하고 서로 맞절을 한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일상속에서 이런 일을 쉽게 마주친다. 분명 같은 일이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이 다른건 뉴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이고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가지는 기억이 다르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다. 분명 같은 일인데도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을 하기 위해 노력들을 한다.
 
 문득 영화를 보고나니 프레임이라는 것이 생각난다. 우린 같은 사건을 각자의 프레임에 맞춰 해석하고 판단한다. 사건속에서 타죠마루는 자신의 강함과 용맹을 증명하고 부인은 자신의 절개를 사무라이 역시 사무라이로써의 용기를 주장한다. 사회적 프레임과 계층적 프레임 안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프레임으로 사건을 해석해내고 기억을 구성한다.
 
 그렇다고 인간이란 존재는 못 믿을 존재인가? 다만 이에 대해서는 직장 선배가 해줬던 말이 기억난다.
 
 "좋을 때나 서로 좋은 기억인거지, 힘들 때 그 사람에게는 악몽으로 변할지 모른다."
 
 과연 그들이 겪은게 서로를 향한 약탈과 살인, 강간이 아니라 힘을 함쳐 도적을 물리친 영광의 기억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서로에게 맞춰 윤색이 되었을까?
 
 
▼ 프레임에 관한 책
[독서 노트/인문(사회,정치,철학 등)] -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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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어가며

 

 채피는 2015년 개봉작이니 꽤나 오래된 영화다. 포스터는 꽤나 귀여워 보이는 로봇에 온갖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고 벽에도 귀여운 그림들과 함께 총이 뉘여져 있는 걸로 봐서 굉장히 가볍고 발랄한 영화라는 느낌이나는터라 포스터를 보고 영화를 봤다면 분명 욕하는 사람이 많았을 꺼라고 생각되는 영화이다. 엄청나게 디스토피아적인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를 보는 감상을 표현하자면 마치 너른 밭에서 감자를 캐내듯 영화 장면과 대사 곳곳에 숨겨져있는 감독의 메세지를 드러내고 고민을 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즐거운 영화였다. (즐겁다 라고 하기엔 주제가 좀 무거운 것 같은게 사실이다.)
 
 이 때는 알파고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이니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제는 영화의 모습들이 일부분은 현실로 실현이 된터라 좀 더 마음이 무겁다. 지금도 A.I가 인류를 구원 할 것인지 인류를 위협할 것인가를 부터 시작하여 여러가지로 A.I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영화를 보고 나도 문득 궁금해졌다.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의 예측처럼 A.I가 특이점을 넘어선다면 과연 무엇으로 A.I와 인간을 구분 할 수 있을까?
 

2. 신화

 

 등장 인물들을 뜯어 보면 참 재미있다. 먼저 채피의 원형인 로봇 스카우트의 제작자이자 채피의 A.I 설계자인 디온은 마치 신을 연상시킨다. 그는 기존 인간이 혹은 산업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해(계속 되는 파손으로 인해 복구에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상황) 폐기 처분 위기에 놓인 22호를 사장의 지시를 어기고 빼돌려 자신이 개발한 A.I를 장착시킨다.

 
 그리고 그는 곧 채피를 자신을 납치한 갱단에게 빼았기는데 그 와중에도 채피에게 자신이 그를 창조한 창조주임과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희망, 그리고 인간을 해치지 말라는 약속을 하게 한다. 마치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곧장 갱단에게 채피를 빼앗기는데 그들 (특히 아메리카와 닌자)의 모습은 마치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하는 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디온과 대치하는 빈센트는 마치 창조론의 수호자처럼 보인다. 자율적인 A.I를 부정하고 그림을 그리는 채피를 발견하고 성호를 그은 그는 채피를 잡았을 때 그의 머리에 든 것은 데이터 덩어리일 뿐이라고 소리친다.

 

3. 채피

 

 영화는 당연히 채피를 빼놓고 말을 할 수 없다. 채피의 모습은 완전히 인간을 연상시킨다. 하긴 개발자인 디온의 목표가 당연히 인간처럼 느끼고 생각하는 A.I 였으니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그리고 마치 인간처럼 주변에 관계된 인간들을 변화시키기까지 한다.
 
 소심하고 나약해보이던 디온은 총을 들게 했고 거칠고 악의만 가득차 보였던 욜란디는 '마미'를 자청하게 만들고 그를 아기처럼 돌보게 한다. 종국에는 처음에는 채피를 도구로 물건으로만 다루었던 닌자조차 말뿐이 아닌 진짜 '파더'로 행동하게 만든다. 현금 수송차를 털고 새로운 몸을 줄 수 없다고 고백하고 그 사실을 안 채피가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따지 듯 왜 거짓말을 했냐고 격렬하게 항의하는 채피에게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고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짓는 닌자를 보며 연출한 감독에게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압도적인 악의를 보이며 마치 성전을 치루며 악을 정화를 행하는 듯 잔혹한 행동을 서슴치 않으며 자신의 '마미'를 죽인 빈센트를 공격하는 모습은 영화를 지켜보고 있는 나마저 로봇이 인간을 공격하는 모습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하게 동조 시키게 만들었다. 정리하자면 빈센트보다 오히려 채피가 더 인간다워 보였다.
 
 채피는 다른 로봇들과 달리 애초에 수명이 정해져있었다. 배터리 손상으로 인해 수명은 단 5일, 태생부터 굉장히 인간답다.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답게 영생을 꿈꾼다. 자신을 불완전하게 탄생시킨 디온(신 혹은 설계자)에게 항의하고 디온이 불가능하다고 한 마음을 옮기는 일까지 해낸다.
 

 

4. 과연 무엇이 인간인가?

 

  채피가 아직 세상을 제대로 알기전 욜란디가 읽어주던 책에서는 검은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채피에게 '겉모습이 다른것은 중요하지 않고 내 안에 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그게 널 다르게 만들어준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닌자의 손에 이끌려 나간 맞닥드린 세상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채피의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채피의 겉모습을 바라보고 로봇 경찰이라고 공포에 질리거나 경멸한다. 채피가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다. 채피가 완전히 성숙하고 주변은 채피를 인간적으로 받아 들였지만 양키와 빈센트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로봇일 뿐이었다.
 
 이 영화의 결말은 소름끼친다. 디온은 마음은 옮길 수 없음으로 채피가 다른 로봇으로 옮겨지면 더 이상 같은 로봇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견해는 채피를 처음부터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던 마미 욜린다고 마찬가지다. 그런데 영생에 대한 욕망으로 마음을 옮기는데 성공한 채피는 그 첫번째 대상으로 죽어가는 디온을 로봇으로 옮긴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디온은 살아 있었고 자신이 로봇의 몸에 들어 갈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미 과연 그 디온이 이 디온인지 그냥 복제된 데이터인지에 관한 의문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소름돋는 건 그 다음이다.
 
 닌자를 구하기 위해 죽은 욜란디, 어찌보면 사랑하는 이를 위한 죽음이라는 굉장히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육신은 땅아래 묻힌다. 그런데 채피가 그녀의 마음의 백업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다. 욜란디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영혼은 이미 먼곳으로 떠난 상황, 그렇다면 USB에 담긴 그녀의 마음 무엇일까?
 
 채피는 그녀의 마음 백업데이터를 이용해 그녀를 살려낸다. 그녀의 모습은 좀 더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채피는 말한다.
 

"이젠 우린 둘다 검은양이야"

 

 조금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부활한 욜린다는 채피보다 조금 더 인간적일까? 아니면 모두가 채피 같은 모습이 되면 채피가 가장 인간적일까?

 

5. 마치며

 

 지난 여름에 레리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를 읽었었다. 문과인 나에게는 외계어가 쓰여진 것 같은 더럽게 어려운 책이 었다. 책에는 여러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인간은 육신을 벗어던지고 데이터가 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예건이 되어있었다. (내가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그때는 최근 영화였던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는 로봇몸에 들어가 디온을 떠올리게 되었다. 과연 로봇의 몸에 들어가서 말하는 디온은 정말 인간 디온일까? 아니면 디온의 데이터일까?
 
 문득 '우리는 객체이자 주체로써 서로를 투사한다.' 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아직까지는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은 인간끼리 서로 증명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A.I가 더 자연스러워지고 모두 채피와 같은 모습이 되면 채피가 인간이 되는 것일까?
 
 검은양이 농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면 과연 양은 검은색일까 흰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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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보리밭을 흐드는 바람' 에 이어 또다시 켄 로치 감독에게 황금종려상의 영광을 안긴 영화이다.

 

 왠지 음울해보이는 겨울의 뉴캐슬을 배경으로 평범한 시민이자 노동자였던 다니엘 블레이크의 모습에서 아직은 젊기에 별달리 고민되지 않았던 과연 복지란 시민으로써의 당연한 권리인가 아니면 국가에서 불우한 이웃들에게 배푸는 시혜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2. 영화의 줄거리

 

 영화는 성실한 목수로 살아가던 다니엘 블레이크가 갑작스러운 심장병으로 인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되며 질병수당을 청구하기 위해 상담을 하는 모습에서 시작된다. 다니엘의 담당의사는 일단 치료는 끝났지만 아직까지 일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질병수당을 지급 여부를 심사하는 의료전문가는 심장과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을 하면서 다니엘에게 아직 일 할 수 있음으로 질병 수당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다니엘이 무려 52쪽에 이르는 질문지에 대답을 하고 당신이 나의 주치의 보다 나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소리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기 그지 없다.

 

 결국 다니엘을 질병수당 심사에서 탈락하고 만다. 당장 수입이 끊어지면 생계가 어려워지는 다니엘은 항소를 하려고 하지만 그 역시 지난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다. 익숙하지 않은 컴퓨터와 인터넷, 걸려오지 않는 담당관의 전화, 프로세스와 규칙을 들먹이며 사람들을 차갑게 대하는 공무원들 다니엘은 이 모든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니엘은 항의하기 위해 찾아 갔던 사무소에서 이주 싱글맘인 케이티를 만난다. 케이티 역시 어떤 수당을 받기 위해 찾아 왔지만 익숙치 않은 길로 인해 약간 지각을 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한다. 당장의 아이들 전학비용이 필요한 케이티는 격렬이 항의하지만 담당자는 차갑게 자신들의 프로세스와 룰을 설명해 줄 뿐이다. 어쩌면 사람들과 가장 가까워야 할 복지 분야에서 조차 인간보다 우선되는 것은 프로세스이고 비용이었다. 이에 화가난 다니엘이 끼어들면서 다니엘과 케이티의 두 아이는 인연을 맺게 된다.

 

 등장인물의 삶은 뉴캐슬의 을씨년한 날씨만큼이나 우울하기 짝이 없다. 다니엘의 옆집에 사는 다니엘이 차이나라고 부르는 청년은 창고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겨우 푼돈만 받을 뿐이고 케이티는 두 아이를 위해 몸을 팔기까지 한다. 목수였던 다니엘의 집안에 있던 고풍스러운 그리고 아내와의 추억이 긷들어 있는 가구들은 하나 둘씩 팔려나간다.

 

 결국 지쳐버린 다니엘은 그들이 정상적인 방법이라 이르는 프로세스로는 더 이상 일이 진행되기 어렵다고 느낀 다니엘은 그들이 말하는 규칙에 위배되는 일을하며 결국은 항소에 이르게 되는데...

 

3. 복지는 시민의 권리인가, 국가의 시혜인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다. 바로 무상복지, 무상급식, 무상xx 등 이다. 소위 우리나라의 보수라는 인물들이 만들어낸 말도 안되는 용어 이자 프레임이다. 대체 무상복지, 무상급식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다 우리가 세금으로 이미 지불한 비용이다. 다만 그 쓰임새가 다른 곳이 아니라 복지와 아이들의 급식일 뿐이다.

 

 차가 몇대 다니지도 않는 곳에 도로도 깔고 몇 되지 않는 군대의 간부들을 위해 골프장도 지으면서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복지에 대해 그리도 비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런 부분에만 무절제하게 사용하는 것은 분명 경계하고 지탄 받아야 할 일이지만 이것들은 분명 납세의 의무를 충분히 치러낸 일반 시민으로써 충분히 요구 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복지에 사용되는 돈들은 결코 눈 먼 돈이 아니고 우리는 그것의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다. 국가와 정치인들이 우리에게 복지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권리를 실현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니엘은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찾으러 갔으나 그를 대하는 인물들은 마치 그들이 선심을 쓰는 듯 말을 하기 시작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만들어진 복지 시스템이 사회적 약자들을 배척하는 듯 온갖 어렵고 복잡한 프로세스만 가득하고 그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는 고압적이기 짝이 없다.

 

4. 프로세스가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사실 이 문제는 쉽게 무엇이 우선인가를 이야기 할 수 없는 부분이긴다.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노동자라면 다들 한번쯤은 고민을 해 보았을 문제이다. 어떤 이들은 일이 되게 하는게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프로세스를 한번 어기기 시작하면 두번어기는 것은 쉽게 결국에는 엉망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미 시간이 좀 흐르기는 했지만, 세모녀 사건 역시 프로세스와 룰이 우선되다보니 생긴 일일 것이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그 속에 속한 사람은 개인의 판단과 양심보다는 조직의 프로세스에 종속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다니엘을 돕는 것은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이 아니라 그의 이웃들이다. (사실 요즘 같은 사회에서 이것도 상당히 이상적이다.)

 

5. 마치며

 

 영화가 끝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다니엘이 남긴 편지였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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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헥소 고지'는 실제 세계 2차대전 당시 일본 오키나와 헥소 고지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한 것이다. 영화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과연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전장속에서 어떻게 75명이나 구했을까 의문을 가졌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전 분대원이 라이언 단 한명을 구하기 위해서 했던 노력을 그린 영화 였지만 이 영화는 단 한명의 위생병 도스가 75명의 부상병을 구하는 영화이다. 정말 실화가 같지 않은 실화를 다룬 영화이자 어떻게 보면 참 미국스러운 상업 전쟁영화였던 것 같다.

 

2. 개인의 신념 VS 집단의 신념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사실 엔드류 가필드를 이런 전쟁영화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약간 모자란듯 하면서도 늘 몽상에 빠져있지만 긍정적인 데스몬드 도스 역활을 훌륭하게 연기했던 것 같다.

 

 데스몬드 도스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이다. 그는 종교적 이유를 포함한 자신의 신념을 이유로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대한민국이었다면 21세기에도 당연히 바로 철창행 이었지만 미국은 본토를 침공당한 2차 대전 당시에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병역을 거부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진 입대를 한다. 그의 목표는 의무병으로써 한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는 것이었는데. 당연히 이런게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군대라는 집단에서 통할리가 없었었다.

 

 데스몬드 도스가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글로버 대위를 비롯하여 같은 동료들 마저 데스몬드 도스에게 집단 린치를 가하면서 그를 쫓아내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지만 도스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병영에 머무르는데. 결국은 군사법정까지 끌려가게 되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결국 자신을 지킬 총 한자루 없이 헥소 고지로 투입되게 된다.

 

 군대란 정상적인 사회로 보았을 때, 어찌보면 집단적 정신착란에 빠진 집단이다. 글로버 대위가 도스와 처음 상담을 할 때 도스가 모병관을 통해 들었던 내용이 다르다. 무언가 행정적으로 잘 못처리가 된 것 같다고 말을하자 글로버 대위는 이렇게 일갈한다. 

 

미국 육군이 잘 못 했을 리가 없다! 여기서 무언가 잘 못 되었다면 그건 바로 너야!

 

 흔히 우리의 인상속에 광기에 휩쌓인 군대라고 하면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러시아 붉은 군대나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전차를 일본도로 내리치던 일본 육군을 떠올릴 지도 모르지만 결국 볼프 슈나이더의 책 '군인' 에서 나오는 것 처럼 모든 군대라는 집단은 어떠한 광기에 휩쌓여 있을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최우선을 금지하는 살인을 정당화하고 훈련하는 그리고 자유와 정의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그 구성원에게는 폭력과 구속을 행하는 집단에서 그들을 계속해서 묶어주는 어떠한 구호나 신념이 없다면 그 집단이 유지 될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총은 중요한 역활을 한다. 병사 개인을 지켜주는 무기이자 옆의 동료를 지켜주는 나아가서는 집단을 지키고 승리를 가지고 올 수있는 집단이 공유하는 상징 혹은 신념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희의 연인이자, 애인, 첩이 될 것이다!

- 소총을 배분하며 -

 

 여기서 도스는 일종의 미운 오리새끼가 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집단의 기본적인 신념을 거부한 존재가 된다. 도스는 자신을 '양심적 협력자' 라고 표현하지만 이미 집단의 광기에 휩쌓인 타인들에게 그런 말이 통할리가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도스는 미운 오리새끼이자 자신들의 양심을 콕콕 찌르는 작은 못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덕분에 같이 지내는 동료는 너의 도덕성이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냐고 소리치며 집단에서 배척하기 위해 혹은 집단의 신념을 받아 들이라고 강요한다. 외부의 적에 대항하여 조국의 소중한 것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구성된 집단이 내부의 구성원의 소중한 것을 지켜주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다.

 

 하지만 도스는 개인의 신념을 지키면서도 자신이 목적한 바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다. 군사법정에서 플리바겐(사전에 유죄를 인정함으로써 형을 경감받는 행위)을 통해 집으로 무사히 귀환 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말한다.

 

전 위생병으로써 소임을 다하며 전우들과 생사를 넘나들며 생명을 구할준비가 되었습니다. 세계가 분열되는 와중에 전 그저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평화롭게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군사법정의 장면이 도스의 정의감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는 했지만 내 눈에는 굉장히 아이러니 했는데. 결국 영창으로 갈 도스를 구한 것은 어찌보면 그를 내쳤던 군대라는 집단의 신념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스의 아버지가 옛 상관을 찾아가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가져온 편지를 건낼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이 효과를 발휘 할 수 있었던 것도 전우애, 상명하복 등의 집단의 신념 아닌가?

 

3. 포화 속으로

 

 결국 총 한자루 없이 오키나와 헥소 고지에 투입된 도스는 최선을 다한다. 의무병을 외치는 동료들에게 달려가서 지혈을 하고 모르핀을 투약하고 후방으로 이동 시킨다.

 

 첫 전투가 있은 후 다음날 아침 몰려오는 적군에 의해 퇴각하는 과정에서도 부상병들을 챙기기 위해 여념이 없다가 결국 모든 병사들이 헥소 고지를 내려간 와중 검은 포연 속에서 의무병을 외치며 도움을 구하는 부상병들을 구하기 위해 데스몬드 도스는 다시 전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것이 도스가 지키려고 했던 신념이었다. 전우애를 외치던 집단이 신념을 내려놓고 고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와중에도 도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포화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하지만 내 신념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그런 내 자신과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죠?

 

 도스는 밤새도록 부상병들을 찾아내어 고지에서 내려보낸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훈련소에서 엉뚱하게 매듭지어 졌다며 구박 받던 매듭을 사용던 것이 인상에 남는다.

 

주님 부디 제가 한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한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한명이라도 더' 라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피로에 비척거리는 몸을 이끌며 부상병들을 구하는 도스의 모습은 그야 말로 감동이였다. 결국 자신을 구박하던 하사마저 구한 도스는 헥소 고지에서 내려온다.

 

4. 그렇지만...

 

 헥소 고지에서 내려온 도스는 자신의 몸에 물을 부으며 자신의 것인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를 씻어 낸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있는 도스에게 글로버 대위가 다가와 다시 헥소 고지에 오르자고 말한다. 동료들을 위해 전투의 승리를 위해 '너'라는 상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날은 도스의 안식일이다. 종교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쉬어야 하는 날이다. 그렇지만 도스는 동료들을 위해 헥소 고지를 오르고 그곳에서 동료들을 지키려고 하다 부상을 당해 다시 헥소고지에서 내려온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일본군과 미군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구했던 도스는 결국 다시 무정한 전쟁속에서 승리라는 이름 때문에 적군을 죽이기 위해 아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투입되는 모습이 또다른 아이러니 라면 아이러일 것 같다.

 

5. 멜 깁슨의 영화

 

 역시 멜 깁슨의 영화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리얼리티가 잘 살아이 있는 영화였다. 특히 영화 도입부의 장면은 마치 라이언 일병과 같은 현장감을 주면서 전쟁의 참혹함이 잘 들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엔딩 부분의 병사들이 흙 구덩이 속에서 하나 둘씩 사망해가는 장면과 패배를 직감한 일본군의 장군으로 보이는 이들이 마치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듯 할복 자살을 준비하는 모습을 대비해 보여주면서 전장의 일반 병사들에게는 전쟁과 전쟁터가 지옥과 같은 곳일지 모르지만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게는 일종의 장엄한 의식이나 게임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6. 맺으며

 

 영화의 마지막에 영화의 인물들이 출연하여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온다. 개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그리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훈장까지 받았던 데스몬드 도스를 보면서 문득 파수꾼에서 보았던 구절이 떠올랐다.

 

 "진 루이즈, 각자의 섬은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

- 핀치 박사 -

 

 결국 영화속에서 최후까지 남아서 자신의 동료를 구한 것은 데스몬드 도스의 개인의 신념이었다. 우리 대부분은 어떤 집단에 속해 있을 것이다. 혹시 집단의 양심 혹은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양심을 배신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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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어제 굉장히 우연한 기회에 표를 얻어 '밀정' 시사회에 다녀오게 되었다.  일단 간단하게 감정을 표현하면 긴장감과 위트 그리고 반전이 적절히 섞인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였다. 참여한 배우들의 면면의 이름 값이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

2.  배우들

 일단 출현진들 라인업 자체가 어마어마 하다. 말이 필요없는 송강호, 부산행으로 천만을 달성한 공유, 한지민, 엄태구, 신성록, 츠루미 신고, 이병헌은 특별 출연으로 짧은 시간 나오지만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폭발 시킨다. 출연자들 하나하나가 다들 연기력이나 존재감이 어우....

3. 밀정과 암살

 설명을 들어보면 밀정이나 암살이나 비슷비슷 할 것 같다. 일단 의열단이 나오고 상해와 경성이 나오고 독립운동을 하는데 내부 배신자도 있으니 굉장히 비슷비슷 해보인다. 그럼 밀정과 암살은 무엇이 다를까?

 암살이 화려한 액션 영화였다면 밀정은 어둡고 칙칙한 느낌이 강하고 배신(?)이 이어지고 대체 어떤 놈이 나쁜놈이야? 라고 의심하게 되는 심리 스릴러에 가깝다고 표현하고 싶다.

4. 이정철과 황옥

 송강호가 연기한 이정철은 일제시대 실존 인물이었던 황옥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황옥은 실제 일본의 경기도 경찰부 경부로 활동하면서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의 주동자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과연 임시정부의 인사로 활동하다. 그들을 팔아먹고 경부가 된 이정철은 성공을 위해 의열단에 밀정으로 잠입하는데. 그의 미래는? 

5. 그 외

 시작할 때 말했 듯이 영화에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모든 관객들을 빵빵 터트리는 장면들로 관객들의 긴장감을 풀어준다.

 왠지 보다보면 "어? 왠지 익숙한데?" 라는 느낌의 장면들이 나오는데 왠지 '화양연화'에 나왔던 슬로우모션와  BGM이 나왔던 것 같은데. 이 장면이 이정철의 조국을 정하는 중요한 장면 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경쾌한 배경음악에 펼쳐지는 비장미 넘치는 장면들은 왠지 킹스맨을 떠올리게 하면서 슬프다.

 마지막으로 히가시 부장의 말이 떠오른다 "데라우치 총독이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들의 선택은 두가지 뿐이다. 복종하거나 죽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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