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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 어쨋든, 전쟁 이야기는 아주 많은 부분이 사실이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이 드레스덴에서 자기 것이 아닌 찻주전자를 가져갔다는 이유로 정말로 총상을 당했다.

 

 책은 위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처음 책을 펼쳐들고 읽을 때는 별다른 의미가 없던 것 같은 문장이 책을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을 때, 책의 내용을 얼마나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드레스덴에 대해서 알지 못할 것이다. 물론 나도 알지 못했다.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독일의 문학가 에리히 캐스트너는 자신의 자서전에 드레스덴의 포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정말이지 드레스덴은 멋진 도시였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아니, 내 말을 꼭 믿어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리 부자 아버지를 두었어도, 내 말이 맞는지 알아보려고 기차를 타고 드레스덴으로 갈 수는 없다.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단 하룻밤 사이에, 단 한 번의 손놀림으로 그 도시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이 만들어지기에는 수백 년이 걸렸지만, 그 도시를 땅 위에서 날려버리기엔 두어 시간으로 족했다. 1945년 2월 13일의 일이었다. 전투기 팔백 대가 수류탄과 폭탄을 퍼부었다. 그리고 허허벌판만 남았다. 뒤집힌 원앙 어선처럼 보이는 몇 무더기의 거대한 잿더미와 함께. - 에리히 캐스트너

 

 비슷한 시기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 된 옆나라의 도시만큼 우리에게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독일의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수 만명의 사람이 사망했다. 그리고 그 폐허속에서 미군 포로인 늙은 고등학교 선생 에드거 더비가 지하묘지에서 찻주전자를 가져왔다 들켜 약탈죄로 총살을 당한다.

 

 책에서는 이런식으로 수많은 아이라니가 벌어진다. 더비는 찻잔 하나에 목숨을 잃지만 전쟁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은 작던 크던 무언가를 가지고 떠난다.

 

 책의 첫장에 등장하는 저자의 약속처럼 이 책에는 프랭크 시나트라나 존 웨인 같이 마초적이고 영웅적인 인물도 거대한 악당이나 권력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트랄파마도어' 라는 외계인에 납치당했다 풀려난 후 풀려버린 시간을 뒤죽박죽 헤메며 전쟁의 모습과 그 이후의 이야기 해주는 빌리는 오히려 삶에 대한 의욕없고 완전히 무해한 사람처럼 보인다.

 

 빌리는 시간여행을 하는 동안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 상황에 개입하여 무언가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흔히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타임패러독스 같은 이유가 아니다.

 

▶ 그로부터 25년 뒤 빌리 필그림은 일리엄에서 전세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 비행기가 추락할 건 알았지만 그런 말을 해서 바보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4차원을 볼 수 있는 트랄파마도어인들은 우주의 미래가 어떻게 끝이 날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결말을 바꾸지는 않는다. 트랄파마도어인들에게 인생이란 길고 긴 시간동안 수 많은 원인과 결과를 쌓아 올린 장편 소설 같은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순간순간 같은 것이고 그것을 작은 파이프를 통해 들여다 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개념에는 자유의지란 없다. 

 

▶ 그 조종사는 늘 그걸 눌렀고, 앞으로도 늘 누를 겁니다. 우리는 늘 누르게 놔두었고 앞으로도 늘 놔둘 겁니다. 그 순간은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트랄파마도어에는 전문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 말이 맞습니다. 각 기호들의 덩어리는 짧고 급한 메세지입니다. 하나의 상황, 하나의 장면을 묘사하지요...(중략)...시작도 없고, 중간도 없고, 끝도 없고, 서스펜스도 없고, 교훈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습니다.

 

 빌리의 뒤죽박죽 된 시간여행 속에서 많은 것들이 죽는다. 별 볼일 없는 이유로 죽고, 폭격으로 죽고, 심지어 샴페인도 죽는다. 어쨋든 많은 것들이 죽는다. 그 때마다 '뭐 그런거지' 라는 문장이 반복된다. 책의 제목인 드레스덴의 제5도살장에 포로로 수용되어 있다 운이 좋게 살아 남은 빌리는 미국으로 귀환 후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책에서는 뚜렷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로서 폭격으로 인한 참상을 겪은 후 남은 트라우마가 아닐까? 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빌리가 어릴 때부터 심약한 성격이라는 것은 이야기 곳곳에 잘 드러나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조차 특정한 순간의 나쁜 상태라고 바라보는 트랄파마도어적인 태도를 수용함으로써 그 트라우라를 극복해낸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책을 읽고 나서도 한동안 대체 이게 왜 최고의 반전(전쟁을 반대함) 소설 중 하나라고 소개되는지 의아했다. 노골적으로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참혹한 전장에서 불행한 주인공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토막난 시간속에서 온갖 방법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게 '뭐 그런거지' 라는 무미건조한 말을 툭툭 던지다 끝이난다.

 

 그리고 나중에 책의 내용을 되뇌이다. 저자는 전쟁에 '왜' 나 '무엇 때문에' 에 같은 이유를 붙이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드레스덴 폭격을 계획 할 때 수 많은 '왜'와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을 받았을 것이고 그것의 필요성에 대한 보고서를 한 다발은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로 인해 죽은 이들에게 이유가 필요한가? 이것을 드레스덴이라는 한 도시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것으로 확대한다면?

 

▶ 자, 여기 우리도 그런 거죠. 필그림 씨, 이 순간이라는 호박에 갇혀 있는 겁니다. 여기에는 어떤 왜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책의 구조가 기가막힌다. 저자가 책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장면을 서술한 첫장은 아래와 같이 끝난다.

 

▶ 들어보라 :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났다.

    그 책은 이렇게 끝난다.

    지지배배뱃?

 

 그 후, 빌리 필그림이 등장하하는 내용은 정확히 동일한 문장으로 시작해 '지지배뱃?' 하고 우는 새소리로 끝난다. 나는 독자로서 이미 책의 시작과 끝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하나 바꾸지 못했다. 그리고 순간순간들을 별 의미 없이 넘기고, 모든 것들을 보고 난 이후에야 이 책이 굉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소설 속 트랄파마도어의 책을 엿본 기분이었고 빌리의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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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때가 때라서 그런지 오랜만에 페스트를 다시 읽게 되었다. 같은 까뮈의 소설이긴 하지만 이방인을 읽은 사람에 비해 페스트를 읽은 사람을 만나본 일은 거의 없다. 아무래도 노벨 문학상의 영향일까? 라고 생각하기에는 두 책이 주제는 비슷하지만 굉장히 다르다. (일단 두께부터가 페스트가 압도적으로 두껍다.)

 

 그리고 혹시나 페스트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나 묘사를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책에서는 인간에게 갑작스레 가해지는 부조리 혹은 악으로써 페스트라는 질병을 택하고 질병에 저항하는 개개인의 인물이 중점을 맞춰 써져있다.

 

 만약 정말 흑사병이 중세 유럽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 읽고 싶다면 존 켈 리가 지은 흑사병 시대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참고 이 책은 절판 되어 일반 서점에 팔지는 않는다. 운이 좋다면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고, 영어에 자신이 있다면 “The Great Mortality” 라는 원서를 읽으면 될 것이다. (구글북에서 ebook으로도 판다.)

 

2. 책의 줄거리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단순하다. 어느 날, 오랑시에 쥐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불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어 오랫동안 잊혀졌던 병이 잘 작동하는 시계의 추처럼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을 영위하던 오랑시의 시민들은 덮친다. 시민들은 사라졌을 것이라 믿었던 병이 오랑시에 나타나자 큰 혼란에 빠진다.

 

 책은 이 혼란스러운 도시에서 몇몇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의사인 리외이다. 그러나 때가 때이니만큼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파늘루 신부이다. 그는 페스가 확산되고 사망자가 늘어 갈수록 위기 극복을하기 위해 신앙에 의존해야 된다고 소리를 높인다.

 

 페스트는 사악한 자들에게 가해진 신의 징벌이라 설교를 하며 신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 순종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페스트가 지속되고 자신의 눈앞에서 아무런 죄 없는 어린 오통의 아들이 밤사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스스로의 말이 설득력을 잃어 버린 것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을 완전히 놓지는 않는다. 그는 페스트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십자가를 꼭 쥐고 의사의 진료를 거부하며 죽어간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화자인 리외는 까뮈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물에 가까울 것이다. 의사인 그는 특별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의사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비루한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페스트가 오랑시를 덮치자 무기력해보이던 리외가 점차 변해간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파괴하는 거대한 부조리에 대항해 점차 현실주의자로 변해간다.

 

 그는 인간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에 부조리함을 느끼지만 그것보다 더 페스트라는 병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듯 죽어나가는 것이 더욱 부조리하다고 여긴다. 리외에게 페스트라는 질병은 파늘루 신부의 페스트처럼 추상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현실에 엄연히 실존하고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무참히 파괴하는 현실이었다.

 

 그는 신의 구원을 바라지 않고 페스트에 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페스트에 걸린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병을 옮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페스트에 걸렸다면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리외 외에도 그랑, 타루,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여기며 도시에서 탈출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랑베르까지 페스트에게 투쟁을 한다.

 

 전염병은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하며, 자원봉사대는 모두에게 열려있다고 말했다.

 

 물론 스스로와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 있는가하면 이 혼란을 일으킨 페스트를 사랑하고 이용하는 인물들도 등장한다.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결정을 미루는 관리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이 혼란한 와중에 이익을 얻고 오히려 평온함을 느낀다.

 

 그 중하나가 코타르이다. 페스트가 발생하기 전 자살을 시도했던 코타르는 페스트로 인해 도시가 혼란에 빠지고 자신의 자살을 하려고 했던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페스트가 끝나가는 것을 무척이나 안타까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그쪽하곤 상관 없어요.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라면... 결국 하나 명백한 것은 우리가 페스트와 함께 지낸 날부터 나는 여기가 참 좋다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하지만 시내에는 탈진하거나 낙담해 보이지도 않고 만족감의 살아 있는 표상으로 남아 있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코타르였다.

 

 그는 혼자서 죄수가 되는 것보다는 모두와 함께 포위당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

 

 페스트가 거의 끝나갈 때쯤, 이 도시의 시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도적으로 사람들을 조직하고 이끌며 영웅적인 활약을 보였던 타루가 페스트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허탈한 웃음이 나올 정도로 부조리하다.

 

 그리고 페스트는 나타날 때처럼 갑자기 끝이 난다.

 

 고양이, 지난봄 이후로 처음으로 보는 고양이였다.

 

 마지막으로 리외는 페스트가 언제나 또 다시 우리를 찾아 올 수 있음을 경고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3. 마치며

 

 책에 나오는 페스트처럼 코로나19는 언젠가는 잠잠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얼마나 오래 우리 주변에 머물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빼앗아가고 상처를 남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각자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돌아봐야하는 때인 것 같다. 적어도 코타르처럼은 되지 말아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리외는 추상이 행복보다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나는 일이 있으며, 그럴 때는 오직 추상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중략)...이렇게 해서, 그리고 새로운 차원에서 리외는 그 긴 시기에 우리 도시의 삶 전체를 형성했던, 각자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 사이에서 그런 종류의 지긋지긋한 투쟁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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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왔다고만 하면 서점가에 신드롬을 일으키는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1Q84 이후 실로 오랜만에 나온 장편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굉장한 팬임을 밝히며 서평은 언제나 주관적이었지만 더 주관적으로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미리 밝힌다.

 

 실로 오랜만에 나온 장편소설이다. 나는 정확히는 그의 장편소설에 열광적인 팬이다. 단편소설은 그럭저럭 읽었지만 에세이는 거의 읽어본적이 없는 편이다. 일종의 반쪽짜리 팬인가? 아무튼 예약구매로 도착한 책이 도착 하자마자 몇몇 방해를 이겨가며 그야말로 탐닉하듯이 책을 읽어 내었다. 간결하면서도 몰입도 있는 그의 문체는 여전했고 다시금 완전한 1인칭으로 변한 시점은 과거 "상실의 시대" 나 "태엽을 감는 새" 시절로 돌아간 듯 한 느낌을 주는 소설 책이었다.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하는 이유

1. 무라카미 하루키다. 뭐가 더 필요하지?

2. 그 때 그 시절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한 책, 그렇지만 왠지 나이든 작가를 느끼게 해주는 책

 

  평소처럼 키워드를 뽑아서 서평을 적어보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 머릿속으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간결하게 풀어낼 자신이 없다는게 사실라 일단 간략하게 감상이나 적어보자 한다.

 

  내가 느끼기에 이전 소설인 '1Q84'는 하루키 소설 치고는 굉장히 대중적인 성격이 강한 소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번 소설인 '기사단장 죽이기'는 다시금 1인칭으로 돌아가버린 시점 마냥 굉장히 매니악한 성격이 강한 소설이 되어버린 것 같다. (뭐 나야 좋지만) 하루키의 소설들을 많이 읽고 소위 말하는 '하루키 월드'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소설에서 수 많은 그동안 그의 소설에서 보았던 수 많은 클리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혼, 아이 없는 부부, 욕심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남자 주인공, 어둡고 커다란 구멍, 이데아, 메타포, 섹스 등등 말이다. 하루키 소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들에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면 수 많은 상징과 기호로 가득찬 메타포의 세계에 뜬금없이 내던져저 헤메다 불쾌해진 채 책을 집어 던질 지도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의 이색적인 특징은 평소와 굉장히 다른 느낌의 결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하루키의 장편소설들은 대부분 열린 결말이었다. 이전 소설인 1Q84는 현실 세계로 돌아온 듯 그렇지만 아닌 듯한 결말로 인해 사람들이 다음권이 또 나오냐는 질문과 추측이 인터넷에 쇄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비록 허무하긴 했지만) 예약 구매를 하며 같이 산 비하인드 북의 인터뷰에 보면 분명 닫힌 느낌의 결말이라고 했다. (내가 느끼기엔... 1권으로 다시 가시오 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해변의 카프카' 는 내가 아직까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책이자.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으로 알게해준 책이었다. 이 책이 한국어로 출간된지 대략 14년 쯤 되었을 것이다.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 만큼이나 어렸던 나는 어느 새, 이 책의 '나' 만큼이나 나이를 먹고 말았다. 그 때의 다무라 카프카도 이데아를 보았고 메타포 속을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올해 다시 나타난 '나'도 이데아를 보았고 메타포 속을 헤메고 다닌다. 미묘하게 같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문득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번 더 읽어보고 다시 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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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장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아마 데미안은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이 구절에 관해서는 알 것이다. 고전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대체 이런 책을 초등학교 시절 필독도서로 올려 놓은 사람들은 진짜 책을 읽어보고 필독 도서로 선정을 하긴 한 것 일까라는 큰 의문이 든다. 물론 나도 안 읽기는 했지만 초등학생 때 이런거 읽었으면 아마 다시는 책을 잡을 생각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린이용으로 따로나오는게 있던 건 같지만 말이다.)

 

초판본 데미안 (방탄소년단 2집 앨범 모티브)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 이순학역
출판 : 더스토리 2016.06.20
상세보기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하는 이유

1. 소년의 영적, 정신적 성장기

2. 개인적인 의견이기는 하지만 성장하는 청소년들 보다는 그 아이들을 키우는 어른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내 마음대로 고른 주요 Keyword

1. 선과 악, 밝음과 어둠, 두 세계

 이 책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독실한 신앙을 지닌 유복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였다. 아이는 부모님의 세계 속에 속하여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의 불편한 마음을 모면하기 위해 했던 작은 거짓말로 인해 싱클레어의 밝고 안전한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크로머는 싱클레어의 거짓말을 이용해 소년의 발목을 그러잡고 어둠의 세계로 끌어들여 싱클레어의 인생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소년에게 아버지, 어머니도 모르는 자신만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내가 새긴 최초의 칼자국이었고, 내 유년 시절을 이루는 기둥에 가한 최초의 칼자국이었다.

 

 크로머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던 싱클레어는 새롭게 전학을 온 데미안에 의해 그 상황에서 벗어난다. 데미안은 여로모로 특이한 어른 같은 소년이었다.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마자 다시 그 예의 안전한 세계로 돌아가고 만다.

2. 비판적 사고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카인과 아벨,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싱클레어에게 생각을 하게 한다. 제도권 교육에서 일절 가르치지 않는 것들을 싱클레어에게 알려 줌으로써 비판적 사고를 자라나게 한다. 중세시대 였다면 바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당할 소리였다.

 

다른 아이들과는 전혀 판이한 데미안의 집중된 눈빛은 나에게 무언가 경고를 느끼게 했고 내 마음 안에서 의심과 비판적인 생각이 생겨나도록 했다.

3. 표적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헤어지고 나서 방황의 시간을 가진다. 질 나쁜 친구들을 만나 술에 흠뻑 취하기도 하며 선생님들과 부모님을 실망시키기도 한다. 그는 고독과 방황에서 구원해 준 것은 베아트리체였다.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가 타인의 힘을 빌어서가 아닌 스스로가 창조해낸 첫 번째 이상향(표적) 같은 것이었다.

 

이 베아트리체에 대한 숭배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어제까지는 조숙한 풍자꾼이던 나는 성자가 되려는 희망을 품은 사원의 하인이

 

 이후 싱클레어는 계속해서 자신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간다.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자신에게 비밀을 알려달라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피스토리우스는 분명 좋은 조언자이고 선생님이었을지 모르지만 싱클레어는 또 다시 떠나간다. 결국은 주변에서 그가 표적을 찾을 수 있게 도와 줄 수 있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임의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운명을 자신의 내부에서 송두리째, 그리고 온전하게 끝까지 지켜 내는 것이다.

4. 전쟁

 싱클레어는 아브락사스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자아를 점점 더 선명하게 만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데미안과 재회를 하고 그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만나면서 자신이 원하던 완벽한 이상향을 만난다. 싱클레어의 자아는 이렇게 완벽하게 완성이 되고 행복한 일들만 일어 날 것 같지만 세상은 싱클레어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결국은 전쟁이라는 피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 싱클레어를 휘말리게 한다. 아무리 자신의 자아를 단단하고 아름답게 완성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외부세계와 소통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는 것일까?

 

작별을 고하고 혼자 거실을 지날 때 풍겨 온 히아신스의 향기가 시들고 무미한 죽음의 냄새처럼 느껴졌다. 한 자락의 그림자가 우리들을 덮쳐 온 것이다.

 

 비록 외부적 사건으로 인해 그의 몸은 상처 입지만 그의 자아는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붕대를 감는 것은 몸시 아팠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나는 열쇠를 발견했고, 때때로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형상이 졸고 있는 그 곳, 내 자신의 내부에 완전히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개인적인 감상

▲ 좋았던 점

 일단 책이 기본적으로 좋은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것 같다. 한 소년의 성장기를 철학적으로 참 잘 쓴 것 같다. 이건 그저 이야기 속의 한 소년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들 형태는 다르지만 이런 성장기를 겪어 왔을 것이다. 부모의 보호 속에서 자라던 아이가 점점 커가며 자신만의 이상을 찾고 사상을 지니며 살아가는 모습, 그 결과와 과정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만 다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지내왔다.

 

 글의 서두에서 아이들이 읽기보다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지나고 나면 '아!' 하며 알지만 당시에는 왜 대체 그러는지 알아채지를 못한다. 이 책을보며 아이들의 성장이 어디쯤인지 다시 한번 느껴보면 어떨지?

 

 헤르만 헤세는 다른 책인 '수레바퀴 아래서' 와 마찬가지로 제도권 교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결국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인 사고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잘 아는 것이 아닐까? 현재이 제도권 교육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질문하지도 생각해보라고 하지도 않으니 각자도생으로 잘 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 이건 좀 그래

 책의 후반부에 전쟁이 발발하며 나오는 문장들에서 불편한 느낌이 난다. 나만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전쟁과 그 결과를 미화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이 쓰여지던 시대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중이던 1916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에 출간이 되었다. 이 전쟁에서 독일은 패했다.

 

  W.G 제발트가 '공중전과 문학'에서 전후 (2차 대전) 이후 독일 문학의 침묵을 비판했었다. 이 책의 결말 부를 보니 이 책도 마찬가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예전에 읽었다. '괴벨스'의 전기에서도 괴벨스는 1차 대전에서 패한것을 수치스러워 했다고 했다. 이 책의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 어떤 정신승리 같은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괜한 착각일까?

 

씨름에 완전히 진 일본인은 가버렸고 톨스토이 신봉자도 오지 않게 되었다.

 

이건 헤세의 전쟁결과에 대한 바램 아니었을까?

 

헤르만 헤세의 다른 책

[독서 노트/고전] -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전후 독일 문학에 관한 책

[독서 노트/인문(사회,정치,철학 등)] - 공중전과 문학 - W.G 제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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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누구나 제목을 알고 들어는 본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고전의 정의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책인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서평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1925년 작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는 사실 작가의 생전에는 잘 팔리지 않았던 소설 책이다. 초판으로 2만부를 찍어 내어 겨우 팔고 2쇄로 찍었던 것은 팔리지 않아 결국 작가가 죽을 때까지 그의 집 창고에 처박혀 있었던 책이 영화로 제작이 되고 미국 고등학생들의 필독 도서라고 하니 인생이 어떻게 풀릴지는 아무도 모르는게 맞나보다.

 

 '위대한 개츠비'는 사랑에 관한 책이다. 간단히 내용을 풀이하자면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세계 1차 대전 이후 미국 동부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위해 보여주는 그야 말로 모든 것을 바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체 무엇이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표현 했을까? 닉 캐러웨이의 시선을 따라 가보도록 하자.

 

위대한 개츠비 미니북 세트 (한글판+영문판)
국내도서
저자 :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 이기선역
출판 : 더클래식 201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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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기를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면?

1. 세계 1차대전 이후 미국의 시대상을 잘 알 수 있다.

2.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궁금하다면?

3. 정렬적인 사랑에 대한 로망 충족!

내 마음대로 고른 주요 Keyword

1. 서쪽과 동쪽

  책은 대조되는 것들 을 보여준다. 서부와 동부, 이스트 에그와 웨스트 에그, 돈 많은 자들과 가난한 자들, 이 책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서부의 명문가 출신의 남자이다. 이 사람은 금권주의의 가장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증권업을 배우기 위해 서부에서 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동부로 온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시 시대의 많은 계급층들을 대변하고 있다. 대부분 극단적인 인물들이 많은데 비하여 닉은 가장 균형잡히고 중립적인 인물로 묘사가 된다. 그는 서부 출신이지만 동부의 물질주의를 배우러 온데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편견을 가지지 않을려고 노력하니 아마 최고의 관찰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어지면 이 말을 명심해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너처럼 혜택을 누리고 사는 건 아니란다.

내가 살던 웨스트 에그는 이스트에그에 비해 덜 화려한 곳이었다. 사실 두지역은 상당히 다르고 대조적이라 이런 비교는 피상적일 뿐이다.

 

 개츠비가 서부 출신의 개천에서 용 난 흙수저 출신이라면 톰은 동부 출신의 그야 말로 날 때 부터 황금수저를 물고 자라난 인물이다.

 

 그리고 두 남자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데이지 역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여인이고 이와 대조적으로 톰이 바람을 피는 머틀은 톰을 통해 상류층의 진입을 꿈꾸는 하류층의 여인을 대변하고 있다.

 

 동부와 서부, 혹은 금수저와 흙수저의 삶은 너무도 달라서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개츠비가 뛰어난 능력으로 성공하여 매일 밤, 명사들을 불러 성대한 파티를 열고, 머틀은 톰과 조그마한 파티에 개최하고 개를 기르지만 이들은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였을 지도 모른다.

 

자동차 정비소에서의 풍만하고 육감적이던 생기는 이제 거만함과 오만함으로 바뀌었다. 웃음, 몸짓, 말투 등 머틀의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식적으로 변했고, 그렇게 그녀가 들뜰수록 집은 점점 비좁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창문과 커다란 문으로부터 공허감이 흘러나오더니 현관에서 형식적인 작별을 고하는 개츠비의 실루엣에 완벽한 고독을 더 했다.

 

 아까 닉을 굉장히 중도적인 인물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사람과 대조적인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바로 그와 애정을 나누었던 베이커이다. 닉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지만 캐서린은 닉과는 반대적인 의미로 동일하게 행동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워릭에서 열린 파티에 같이 갔을 때였다. 베이커가 렌터카를 몰고 왔는데, 차 지붕을 열어둔 채 빗속에 주차를 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일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기본 덕목 중에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그게 바로 정직함이다.내가 알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정직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2. 그렇지만 사랑, 하지만 돈

 위에서 나열 하였듯 이 처럼 절대 뭉치지도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인물들을 모아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이었다.

 

 개츠비는 1차 대전에 참전하기전 만났던 데이지를 사랑하여 멀고 먼 길을 돌아 그녀의 집 건너편에 대저택을 마련한다. 개츠비는 그가 데이지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서로의 사고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돈'이 부족해서라고 판단했다.

 

 능력있는 개츠비는 돈을 번다. 그가 돈을 번 방법은 자세히 나와있지 않지만, 유산 같은 것을 통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닌것 만큼은 확실히다. 불법과도 연계되어 있다는 낌새를 풍기며 그는 돈을 번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서 였다는 점이 참 놀랍다.

 

 개츠비는 부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예전의 '지미 개츠'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불행한 미래를 이미 암시했을 지도 모른다. 그

 

이런 행동은 깔금한 그의 매너와 별개로 불안정하며 예의도 없어 보였다. 개츠비는 한시로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다리를 떨거나 초조한 듯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에게는 태생적인 부자가 가지는 여유가 없었는 것 같다.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일군 것들이 하루 아침에 없어질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그의 태도와 갑작스럽게 등장한 부호라는 타이틀은 사람들에게 의심을 안겨 주었다. 아무튼 소문에 상관치 않고 그들은 파티를 즐겼지만 말이다.

 

 마침내 개츠비는 베이커와 닉의 힘을 빌어 데이지와 만난다. 데이지도 다른 여자에게 빠진 남편에 질렸던지 개츠비에게 빠져든다. 둘은 마치 오래된 연인 처럼 사랑을 속삭이고 개츠비는 자신의 파티에 데이지를 초대한다. 과연 그의 파티는 그녀가 즐겨왔던 파티와 어떻게 달랐을까?

 

데이지는 롱아일랜드의 한 구석에 자리한 웨스트에그의 저택에서 왠지 모를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낡은 완곡어법에 느껴지는 활기와 허무한 인생길에서 서로를 내리까는 사람들의 강렬한 생활력에 데이지는 소름이 끼쳤다. 그녀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단 순함에 무시무시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이 대목에서 이미 둘의 사랑은 이루어 질 수 가 없다는 것을 암시 했던 것 같다. 개츠비가 그녀를 위해 추구해왔던 것이 그녀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데이지는 오늘은 뭘할까, 내일은, 십년 후는, 이십년 후는 뭐할 까를 한가하게 고민하는 금수저였고, 개츠비는 하루하루를 계획하고 실천해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흙수저였다. 개츠비는 이미 이런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집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군요."

"데이지는 말할 때 신중하지 못해요."

내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뭔가......"

내가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죠."

개츠비가 내말을 받아쳤다.

 3.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사랑이 어떻게 끝날지 그의 이성은 다 판단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사랑이라는 그의 감정의 끈이 그를 다른 방향으로 억지로 끌었을 것이다. 결국 개츠비는 데이지의 죄까지 모두 끌어 앉은 채 죽고 만다.

 

 닉은 죽은 개츠비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동부의 진실을 깨닫는다. 그의 파티에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던 손님들은 그가 죽자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의 책임이 있던 데이지도 톰도 그를 친구라 부르던 울프심도 그의 집에 얹혀 살던 이들도 그가 죽고 그가 줄 돈이 없어지자 아무도 그를 찾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와 닉이 개츠비 저택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올빼미 모양의 안경을 쓴 건장한 중년 남자만이 개츠비의 장례식에 찾아온다.

 

"저거 말이오. 새삼 확인할 필요도 없어요. 전부 진짜요. 내가 확인해봤거든."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 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

 사랑이란 결국 어느 시대에나 공통적으로 공감되고 모든 이들이 고민하는 사항이니 여전히 이 책도, 고전 필독서라는 명목으로 통용되는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읽다보니 이 책의 내용이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잘 맞는데다가 우리나라의 드라마에도 잘 등장하는 소재라고 생각이 된다.

 

 삼포세대니 팔포세대니 하는 것도 결국은 다 돈 문제에서 비롯된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돈 문제가 해결 된다고 그 뒷 문제가 무조건 해결되는건 아니라는 것을 소설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책에서는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다들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겹치는 캐릭터가 없이 잘 살아있다는게 책의 큰 장점인 것 같다. 어쨋든 개츠비는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을 잠시나마 이루었다. 자신의 쌓아온 모든 것을 바쳐서 말이다. 비록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환상속에 인물과 좀 다르기는 하지만 그 환상을 간직한채 죽을 수 있어서 그나마 덜 불행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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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러브레터'의 이와이 슌지의 소설이다. 그리고 영화로도 나왔다. 그렇지만 서울이나 기타 지방 광역시 급의 대도시가 아닌 도시에서 이런 영화를 보는건 일찌감치 포기하는게 빠를 것 같다. 사실 이 책에 눈길이 갔던 건 책 표지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끌렸다 랄까?

 

 간결한 문체, 절제된 표현 정말 일본 소설 답다고 느낀 소설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아니 나이가 꽤나 든 분들 중에서도 SNS계정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드문게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타인과의 소통의 도구로도 사용하기도 하고 익명성을 이용해서 뒤틀려진 욕망의 도구로도, 혹은 광고로 사용하기도 하고 심어 테러리스트를 모집하는 도구로까지 활용 될 정도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과연 예의와 사회적 관습 등의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현실 세계속 나와 그런 것 따위는 벗어 던지고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서 활동하는 나 중 어디가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일까?

 

2. 책의 내용

 

 일찌감치 부모와 절연하고 파견제 교사로 대도시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나나미, 그녀의 교사를 꿈꾸었던 그녀의 삶에는 별다른 욕망이나 열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20대 초까지 단 한번도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지 않았던 그녀는 '플래닛' 이라는 SNS에서 새롭게 서비스를 하는 인연만들기를 이용하여 한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골인 해버린다.

 

 사실 이 결혼은 현실 속에서 파견교사 자리 마저 잃어버린 그녀가 수세에 몰리다 시피 하여 결정된 결혼이었다. 그녀는 남들의 눈 때문에 부모의 이혼 사실을 숨기고 아무로를 사람을 통해 하객 대행업체에서 사람을 고용한다. 거짓말은 점점 커져가고 SNS에서 그녀는 불안감을 토로하다 마찬가지로 결혹식 당일에 마저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신랑에게 들킬뻔 하기까지 한다.

 

 결국 애초 맞지 않는 옷 같았던 결혼 생활은 이혼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고 그녀에게 그야 말로 기상천외하다고 할 만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여기는 어딜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러 갔다. 얼마나 심한 꼴을 하고 있을까? 거울을 봤다. 어라? 어찌된 일이지? 의외로 얼굴의 혈색이 너무 좋아보였다.

 

3. 마무리

 

 "못 느끼세요? 이 거리를."

 아무로는 손가락을 가리켰다. 어느샌가 두 사람의 거리가 서로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이 거리는 당신이 좁힌 겁니다."

 나나미는 그 순간 뒤로 물러났다.

 "어쩐지 마음이 허전해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 않으세요?"

 

 비록 SNS에서 만나기는 했지만 현실에서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나나미는 왜 아무로에게 더 친숙함과 의지를 했던 것 일까?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책에는 로맨스라는 요소가 거의 없다. 과연 그 '러브레터'를 찍었던 감독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건조하기까지 하다. 이 책에서 진실된 인간 관계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온몸에 안도감이 넘쳤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는데 "만날까요?" 라는 말이 특효약처럼 효과가 있었다.

 

노을빛으로 물든 요쓰야 역에서 가짜 가족은 해산했다. 헤어지기가 서운해서 서로 껴안기를 반복했다. 옆에서 보면 엄청 사이가 좋은 가족이나 해외에서 오래 생활한 가족 같았다.

 

 나나미는 이혼 후 자신이 요청했던 하객 대행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그곳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마치 진짜 가족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진짜 가족과는 거의 절연하다시피 했던 어려운 상황에서도 찾지 않던 가족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느낌을 왜 단 몇시간을 만났던 사람과 느낄 수 있었을까?

 

나나미는 이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서로 SNS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함께 살았다. 이런 시대에 마치 기적과도 같은 나날을 보냈다.

 

 책을 덮고 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이상하게 사르트르 가 했던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말이다. 책의 말미 부분에 나나미는 아무로와 함께 마시로의 유해를 가지고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마시로 역시 AV배우 데뷔로 인해 어머니와는 절연한 관계였다. 어머니는 딸의 유해를 그야 말로대하는데...

 그녀는 술을 마시던 중 나나미와 아무로 앞에서 옷을 다 벗어 버리고는 오열한다. 마치 그녀의 딸이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 모든 일에 감정을 담지 않고 그야말로 업무 처리하듯 처리하던 아무로는 마침내 펑펑 울며 옷을 벗어버리곤 술을 마시며 책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분출한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자신 혹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죽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위로 해 줄 수 있는 것도 타인의 따뜻한 온기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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