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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주, 아니 거의 대부분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날 확률을 과소 평가하고 행운이 찾아 올 확률을 과대 평가하고는 한다.

 

 그래서 벼락 맞을 확률보다 당첨 확률이 낮다는 로또는 매주 사면서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확률로 사고가 날 수 있는 자동차는 거의 매일 타고 다닌다. (내 이야기다.)

 

 물론 이런 걸 일일이 따지고 살면 거의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발생 확률이 0이 아니라는 것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야기 하려는 책은 확률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소설 책을 읽는 재미는 발생 확률이 0%가 아닌 일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현실은 소설 보다 더 하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들어가며

 

 이 책은 자본과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민간에 전해지는 오래 된 설화 속 저주 같은 RB 바이러스, 인간과 흡사한 로봇, AI 선생님, 인체에 내장하는 ESC, 홀로그램북, 화성 관광 등을 통해 사실감을 부여하고 독자의 상상력을 고취시킨다.

 

 의문이 가득한 소년의 이야기가 한 꺼풀 한꺼풀 벗겨지고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가 끝에 다다랐을 때, 작가가 독자한테 원하는 감정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슬픔? 분노? 두려움? 그것도 아니라면 희망이었을까?

 

줄거리 요약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온몸이 새하얀 백색증을 앓고 있는 소년 마오가 다른 이들과 차단된 채 외딴 숲 속 집에 살고 있다.

 마오는 RB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태어났고 바이러스를 치료하고 살아남기 위해, 타인과 다른 자신의 삶을 수긍한다.

 치료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진솔이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다른 소년 하라를 집으로 데려온다. 

  

책의 줄거리

 

 시대는 근 미래,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는 안드로이드가 흔하고 인간은 달에 호텔을 짓고 화성에 정착할 첫 이주민을 뽑으려 하고 있다.

 

 고층 빌딩 숲이 평범한 시기에 울창한 나무로 둘러 쌓인 깊은 숲 속, 최첨단 설비를 갖춘 집에 온몸이 새하얀 소년이 자신의 메이드 로봇과 함께 단 둘이 살고 있다.

 

 백색증을 앓고 있는 소년의 이름은 마오.

 

 이제 16살이 된 이 알비노 소년은 달에 호텔 셀레나를 건설하고 운영에 성공한 거대한 그룹 회장의 유일한 손자이다.

마오는 연약하다. 햇볕을 받으면 알레르기 반응이 강하게 일어나고 먼지와 스트레스, 각종 자극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소년을 이렇게 연약하게 만든 근원은 소년의 부모가 사업을 위해 멸종상태에서 부활시킨 ‘레인보우 버드’가 가지고 있던 희귀한 바이러스, RB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서다.

 

 그 바이러스로 인해 소년의 부모 역시 모두 사망하지만 태아 상태에서 감염된 마오는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소년의 할아버지 회장은 온갖 변이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치료하고 소년을 살리기 위해, 소년을 깊은 숲 속의 집에서 외부와 차단 한 채 살아가게 한다.

 

 그리고 치료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마오는 자신과 같이 RB바이러스에 감염되었지만 생존한 자신보다 2살 많은 하라를 만나게 된다.

 

 평생 사람이라고는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돌봐 준 진솔을 제외하고 처음 다른 인간을 만나는 마오는 자기 삶에 대한 진실과 마주한다.

 

마치며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대표자 혹은 우리의 의견을 대신할 사람을 투표를 통해 뽑고 있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 체계는 분명 민주주의지만 우리의 실 생활에서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돈, 그러니까 물질적 자본이 가지는 힘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단순히 돈이 많은 것으로는 남들에게 존경을 받거나 유명해지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을 졸부라고 부르며 비꼬기도 했다.

 

 그렇지만 요즘은 좀 많이 달라졌다.

 

 돈이 많다면, 그 돈을 쓰는 것을 온갖 SNS 등에 올리며 자랑하는 행위가 유명세를 사고 그 유명세가 명성 또는 영향력을 가지는 시대다.

 

 이렇게 돈으로 해결 가능한 것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적절한 보상이 따른다면 감옥에 가는 것도, 그러니까 자유가 부당하게 억압받는 것도 가능하다고 설문조사에 응답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도덕관념은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변해왔다.

 

 인류 최고의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에 찬성했고, 여성 참정권을 부정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중 하나라는 세종대왕은 어머니가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는 노비종모법을 시행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사람들은 그런 시대에 영향을 받아 자라고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먼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어디까지 허용될까.

 

 돈은 이미 많은 것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인간이 멸종시킨 다시 부활시키는 것을 정당화한 것은 사업(=돈)을 위해서였다. 화성 첫 이주자 그룹에게는 그 이면에 무슨 저의가 숨겨져 알려주지 않고 살 곳과 지원금을 준다.

 

 막대한 기부금으로 사 온 아이의 인생 전부를 저당 잡고, 삶을 이어준다는 명목과 교묘한 속임수로 자신에게 일어난 부당한 일을 스스로 정당화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강압적으로 실험체로 사용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에는 나치, 일본에는 731부대가 있었고, 미국에서는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터스키기 실험이 있었다.

 

 아마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이 일을 말도 안 되는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일이 피해자에게 평생을 써도 다 못 쓸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벌인 일이라면?

 

 솔직히 말해서 내게 책과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상상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아니라 내 후대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실제로 한 부자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어마어마 한 돈을 소비한다.

 그 방법으로 젊은 자기 아들의 피를 수혈하는 처방도 받았다고 한다. 과연 이 방법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굳이 자기 자식뿐만 아니라 자기 몸에 맞기만 하다면 사람을 사서 하지 않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이렇게 한 단계씩 그 수위를 올려 나간다면 개인을 위한 인간 모르모트를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과연 우리는 아니 세상은 그것을 멈출 수 있을까?

 

 
테스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장시켜 줄 허블 청소년 시리즈의 첫 책은 30만 명의 독자들이 사랑한 베스트셀러 『페인트』를 쓴 이희영 작가의 장편소설 『테스터』이다. ‘누가 이토록 연약한 소년을 숲속에 홀로 방치해 두었을까’ 하는 미스테리한 질문 하나로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 작품은 장대하고도 아름다운 디스토피아 SF이다. 그와 동시에 이 소설은 세상과 유리된 채 불가항력에 이끌려 살아가는 먼지 같은 존재들을 위한 곡진한 진혼곡이기도 하다. 오래 전에 멸종된 오방새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함께 복원된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모두 죽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어린아이가 있다. 백색 소년 마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평생 숲속 집에 갇혀 메이드 로봇과 함께 산 이 외로운 소년에게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온다. 바로 RB 바이러스의 또 다른 생존자인 하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소년을 둘러싼 미스테리한 질문들을 파헤친 끝에 마오가 가닿은 반전은 두 소년의 위치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두 소년이 드러내는 슬프고 충격적인 진실은 독자들이 작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도록 한다.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소년들에게 과연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정교하고, 아름답고, 꿈결 같고, 왠지 슬프다. 매력적이고 여운이 긴 작품이다.” -장강명(소설가) “《페인트》와 《나나》를 잇는 또 하나의 명작이 탄생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이희영 작가가 빚어낸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정여울(문학평론가)
저자
이희영
출판
허블
출판일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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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정원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얻은 소설가 홍준성의 세 번째 장편소설 《지하 정원》이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예스24 크레마클럽을 통해 먼저 독자를 만난 이 작품은 여성 식물학자 얀코가 비뫼시라는 가상의 도시 지하에 ‘똬리나무’라 명명된 거대한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에 얽힌 비밀을 파헤쳐나가는 파란만장한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비뫼’라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인간의 정신사를 복원해내고자 하는 작가 홍준성은 한국문학에서는 보기 드물게 거대서사에 도전하는 작가다. 전작 《카르마 폴리스》를 통해서 독자들로부터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 “천명관의 《고래》와도 같은, 이야기의 거센 파도”, “어마어마한 몰입감. 환상적인 문체”, “혼돈과 허무, 역사속의 사회상을 총 집결해놓은 듯”하다는 평을 받은 바 있으며, 2021년 런던북페어에서 화제의 한국 작가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비뫼시는 소문과 이야기, 음모와 정치, 그 모든 것이 우화적으로 교직된 가상의 도시로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현대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비뫼시 지하에 ‘똬리나무’라는 생명 법칙을 모조리 어긴 식물의 자리를 마련한다. 여성 식물학자 얀코는 운명을 따라 문명의 기저에 놓인 거대한 토대를 파헤침으로써 비뫼시의 근간에 무엇이 놓였는지를 마주하게 되는데, 이것은 지금 우리의 도시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이성을 통해 세워졌다고 믿어온 인간 문명사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촘촘하게 기획된 비뫼시의 모습은 소설적 재미까지 더한다. 작가는 정교한 기획과 묘사를 통해 비뫼시를 독자의 앞에 가져다 놓는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물론 경제적·사회적 문제 제기, 더 나아가 자연과학의 법칙을 넘나드는 활달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을 읽을 때 독자는 지적인 쾌감을 느끼게 된다. 장광설과 요설로 가득한 가상의 세계에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 그러다 문득 그 속에 숨은 생에 의지를 만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오랫동안 ‘소설’에 기대해온 바일 것이다. 《지하 정원》은 그런 점에서 소설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다.
저자
홍준성
출판
은행나무
출판일
2023.07.05

들어가며 

 

비뫼시의 진정한 특산물은 고아이다. 고급 모직물부터 진공관 라디오까지 그 어떤 공산품을 가져와도 날마다 쏟아지는 고아들엔 미치지 못한다.

인원수나 통계 따위가 아닌, 어딜 가든 손님의 삶.

과연 비뫼시에서 엄격한 건 발진티푸스와 세금인가?

 
 이 책의 배경을 전체적으로 잘 묘사해 주는 문장들 인 것 같다. 극심한 빈부격차, 권력자들의 전횡, 언론을 이용한 선동과 날조, 치열한 이념의 충돌과 그 사이의 억울한 피해자들 산업화 초기 왕정 같기도 하고 그 이후 사회인 것도 같은 지독하게 불합리한 시대를 세계관으로 한 책이다.
 
 책의 전체 내용을 구성하는 1,000개의 메모들은 시간에 흐름대로 나열된 게 아니라 때때로 혼란스럽지만 속도감이 있어 읽는 동안 집중력과 긴장감을 놓지 않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견고하고 흥미로운 세계관을 기나긴 설명이 아닌 메모에서 드러나는 사건과 정교한 묘사, 신문기사, 회의록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되어 책 속 세계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기적이 사라진 해로부터 XXXX년 뒤 X월, 책을 읽는 동안 자주 만날 수 있는 문장이다. 지금으로 과거인지 미래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는 비뫼시 역사 공사 현장 지하에서 ‘똬리나무’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햇볕도 들지 않는 도시 지하 깊숙이 자리를 잡은 ‘똬리나무’는 넓은 잎사귀를 가지고 복잡하게 뻗은 줄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태양 빛을 이용한 ‘광합성’을 통해 성장하는 나무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이 ‘똬리나무’가 발견 될 때쯤, 얄궂게도 비뫼시에서는 굶주린 빈민들의 식량 폭동이 일어난다. 마치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던 폭동은 그 해 따라 군대까지 투입되며 잔혹한 유혈 진압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가난한 땜장이의 딸로 평범한 인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얀코의 운명을 고아로 하녀 학교의 학생으로,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사람으로, 진실과 복수를 쫓는 것으로 비틀어 놓는다.
 

선택

 

 복잡하게 얽힌 얀코의 삶은 그녀가 선택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고아가 된 것도, 하녀가 되는 것도, 비나드의 이름으로 대신 사는 삶을 사는 일 역시 그녀에겐 아예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삶의 중요한 순간에 선택 중 많은 부분들이 거대한 사건 혹은 권력과 같은 외부요인에 의해 강제로 결정 되었다. 그녀가 본인의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조차도.
 
 개인이 인생을 살아가는 중 홀로 오롯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은 의외로 드물지도 모른다. 많은 선택이 직간접적으로 타인과 그 당시 처한 상황에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많은 일들이 최종적으로는 각자에게 선택권이 주어지고 있고 우리는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들은 항상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메모로 이어지는 삶에서 얀코는 선택을 한다. 랑게의 선의를 받아들이지만 죽음을 향하는 랑게를 외면하고, 참토가 준 쥐고기를 먹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한다.
 
 앞서 말한 고아가 되고 하녀학교에 들어가는 것에 비하면 별 볼일 없는 작은 선택이었지만 오히려 이것들이 그녀의 가슴 속 깊숙이 죄책감 같은 형태로 남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그녀가 선택되어진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일들은 오히려 그녀의 인생을 궁지로 몬다. 고아를 제외한다면 그녀가 선택한 삶은 전보다 윤택한 삶이라고 할 만했고 비나드를 대신한 삶은 그녀의 것은 아닐지언정 빈민굴에서의 삶에 비하면 천국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그녀가 직접한 선택은 오히려 그녀의 삶을 더 괴롭게 하는 것 같다. 스스로가 한 선택에 대한 책임일까?
 
 그것 아니라면 남의 삶을 빌려서 산 대가를 뒤늦게 치르는 것일까?
 

 쓰임새에 따라 물건 라벨이 붙듯, 누군가의 이름 역시 상황에 선행하지 않는다.

 

 

 책에는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이 나타난다.
 
 어떤 이들은 전염병에 목숨을 잃고 다른 이들은 총탄에 죽는다.
 
 책 속에서 현재의 얀코는 뇌종양과 류머티즘에 시달린다. 그녀는 마치 소설 초반부에 말한 것처럼 살아간다기보다 조금씩 조금씩 굳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모습에 회의를 느낀 그녀는 자살을 고민하지만 결국은 자살을 하지 않는다. 과연 무엇이 그녀의 자살을 막은 것일까? 똬리나무에 대한 집착과 복수심 때문일까?
 
 얀코의 메모에는 복수에 대한 이야기가 군데군데 등장한다. 그녀가 아버지를 잃게 되는 계기인 식량폭동이 긴급하고 강경하게 진압된 원인도 비나드를 잃어버린 간접적인 이유도 그녀의 삶을 평범한 땜장이의 딸이 아닌 기구하고도 복잡하게 꼬아버린 원인을 도시 밑 지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똬리나무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똬리나무로 인해 망가져버렸다고 주장하는 삶은 얀코만이 아니다. 얀코에게 똬리나무의 존재를 알려주고 먼저 복수를 다짐한 것은 그녀 인생의 최대 조력자라 할 수 있는 참토였다. 그리고 얀코와 편지를 보냈던 식물학자 역시 정확히 비뫼시 지하의 똬리나무는 아니지만 비슷한 식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렸다고 주장하고, 지하의 똬리나무 위에 거주하던 빈민들은 실제로 자신의 터전이나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
 

제게 남은 건 원한과 시간뿐이랍니다.

그건 일종의 복수였다. 그래, 복수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이게 정말 똬리나무 때문일까??
 
 자신의 복수를 이루고 지옥 같은 남방한계선에서 살아남은 참토는 비뫼시로 돌아가 ‘똬리나무’의 존재를 확인하고 불태워야 할까?라고 말하는 얀코에게 반문한다.
 

그런 뒤엔? 너한테 뭐가 남는데?

 
삶은 지하에서 도시를 떠 받친 채 서서히 썩어가는 똬리나무처럼 허망한 것일까?
 

저주했던 똬리나무도, 그 위에 매달린 도시도 모두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메모에서 복수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꿈’이다.
 
 꿈은 잠시 현실을 잊게 하는 희망이나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지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비나드의 말처럼 결국 언젠가는 깨어나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얀코는 복수라는 꿈 속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 은 아닐까?
 

사랑

 
 책은 비나드가 얀코에게 보내는 편지로 마무리된다.
 
자신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여자와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자의 어설픈 사랑은 뭔가 우스우면서도 풋풋하고 애달프다.
 
 무언가 결여된 것 같은 삶을 사는 두 사람은 서로 만나 서로를 부족한 곳을 채워줄 것 같았지만 결국은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로 끝이 난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있었기에 얀코는 끝까지 살아남고 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복수심이라고 착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밤잠을 아껴가며 그가 꺼낸 말이라곤 이따금 캐러멜이 먹고 싶으면 자기 이름을 팔고서 한두 개씩 먹어도 된다는 쓸데없는 선심이 고작이었다. 좋았다.

아버지는 내 손을 놓았다. 비나드는 내 손을 놓느니 세상을 버렸다. 나는…… 과분한 삶을 산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갰고 또 열었다. 그곳으로 지난 꿈들을 모조리 욱여넣었다.’

 

마치며

 
서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재미있는 책이었다.
 
살아 있는 것 같은 비뫼시에서 벌어지는 일들 뿐만 아니라 남방 한계선에서 끊임 없이 자라고 있는 검은 숲과 그것을 막으려는 벌목꾼과 경비병들, 그리고 검은 숲에 살며 사람을 헤치는 트롤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연달아 두 번을 읽었는데 첫 번째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과 생각 그리고 내용으로 다가오는 책이 여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얀코가 스스로 집착이라 표현할 정도로 그 정체를 파헤치려는 비뫼시 지하에 있다는 ‘똬리나무’ 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똬리나무의 정체를 쫓는 것은 비단 얀코 뿐만이 아니다. 그녀에게 최초로 똬리나무에 대해 알려주는 참토도 무정부주의자들과 다른 도시의 첩자들도 똬리나무의 비밀에 대해 캐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에 맞서 비뫼시의 비밀경찰들과 군인들은 식량 부족으로 폭동을 일으킨 시민들에게 발포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까지 ‘똬리나무’의 비밀을 지키려 한다.
 
대체 그들이 자신의 그리고 남의 인생을 걸어서 까지 파헤치려 하고 지키려고 했던 비밀이 그렇게나 가치 있는 것이었을까?
 
실제는 별 소용도 없는, 지하에서 도시를 받친 채, 죽어가는 거대한 나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가치가 있다고 믿고 그렇게 다룬다면 가치 있는 것처럼 취급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돈, 지폐나 신용카드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신뢰로 견고하게 그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법정 통화의 경우에는 해당 국가에서 그 가치에 대한 보장을 하기는 하지만 비트코인과 같은 것 역시 많은 이들이 그 가치를 인정하면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복수심에 환상이 깨진 얀코처럼 그것들은 결국 비뫼시를 받치고 있는 그저 썩어가는 큰 나무 변모 할지도 모를 일이다.
 

도덕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자들은 이미 죽고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허용된 마지막 도덕률이라 믿는다.

그리고 제일 좋은 당근은 꿈이라고 봤다. 그건 값싸고 강력하고 또한 유통기한도 가장 길었기 때문이다.

똬리나무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곳에서 이토록 거대한 크기로 자라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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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미국 청소년 문학의 대표 작가라 불리는 로이스 로리 장편소설. 모두가 잃어버린 여러 감정들을 찾아나서는 열두 살 소년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1994년 뉴베리 상과 1993년 보스턴 글로브 혼 북 아너 상 수상작이다. 모두가 똑같은 형태의 가족을 가지고 동일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곳. 이곳에서는 열두 살이 되면 위원회가 직위를 정해 준다. 열두 살 기념식을 앞둔 조너스에게 내려진 직위는 '기억 보유자'. 과거의 기억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선임 기억 보유자는 이제 기억 전달자가 되어 조너스를 훈련시키기 시작한다. 조너스는 효율적이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희생된 진짜 감정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저자
로이스 로리
출판
비룡소
출판일
2007.05.18

 

 내가 직접 고민하고, 세상과 부딪혀 때때로는 실패를 겪으며 선택하는 삶이 아닌 다른 이에 의해 계획되고 준비된, 통제가 되지만 실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삶은 과연 어떨까?

 

 다른 이들이 준비해준 이런 삶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일마다 되지 않을 때, 무슨 선택이 옳은 것인지 내가 잘하는 게 대체 뭘까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할 때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줄지도 모를 멘토를 찾기도 하고 누군가는 신을 찾기도 한다.

 

 

 책에 등장하는 마을은 이런 것들을 규칙과 원로들이 대신한다.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면밀하게 감시되고 작은 규칙 위반도 넘어가는 일 없이 마을 전체에 설치된 스피커로 방송 된다.
그들은 결혼, 출산 등 지극히 사적인 영역까지 개입한다. 목적은 최적 혹은 실패하지 않는 기초가족을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실패하지 않는 마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마을의 가구들은 실용적으로 설계된 데다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각 가구의 쓰임새는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조너스가 아는 한 마을에 있는 어떤 문도 결코 잠겨 있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의 결혼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고 출산 역시 직접 하지 않고 직업적인 임산부가 낳은 아이를 부부를 관찰하던 원로들이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을 하고 부부가 신청을 하면 한 해의 특정일에 마치 아파트 분양을 받는 것처럼 입양을 하는 방식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업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기록되고 관찰한 바를 바탕으로 12살 생일에 아이들의 직업이 원로의 발표로 결정이 된다. 물론 아이가 그 결정이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할 경우 이의는 제기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의 주인공인 조너스의 경우 그것조차 규칙으로 금지되어있다.

 

지금이 바로 차이를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을 공동체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행동을 표준화했습니다.

 

 많은 규칙과 감시, 통제가 되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굉장히 안정된 것처럼 보인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자격이 있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각자의 개성은 죽이는 대신 차별은 금지되어있다. 먹을 것도 늘 배달된다.

 

 조금 재미는 없을지는 모르지만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없는 마을이다. 과연 여기에서 사람들은 행복할까?
 

 책이 그려내는 마을은 통제되어있지만 주민들의 삶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 생활은 늘 질서 정연하고 예측이 가능해. 그래서 별로 힘이 들지 않지. 이 삶은 바로 원로들이 선택한 결과야.

 

 12살 앞으로의 직업이 정해지는 날을 기다리며 불안해하던 조너스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기억보유자'가 된다.

 

 조너스는 원래 기억 보유자에서 기억 전달자로 바뀐 스승으로부터 기억을 전달받기 시작하며 마을이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게 된다.

 

우리가 '늘 같음 상태'에 들어가자 눈은 쓸모없는 게 되었지.
전 단지 우리만 있다고, 현재만 있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것이 평등해 보이고 안정된 것 같은 마을에도 차별과 속임수가 숨어있다.

 

 모든 직업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 같지만 조너스 가족의 대화에는 육체 노동자에 대한 천대가 담겨있고, 규칙은 필요에 따라 교묘하게 무시되거나 변경된다.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쓰라는 규칙과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교묘하게 표현을 바꿔치기 함으로써 잔학한 행위를 왜곡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조너스는 마을을 탈출할 것을 결심한다.

 

 '늘 같음 상태.', 책에서 마을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마을의 겉모습은 이상적이다. 아무도 굶지 않고 아프면 방치되지 않고 치료하며 외모 같은 것으로 차별받지도 않는다.
아이들은 체계적인 보육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성장해서는 적절한 직업을 가지고, 원한다면 가족을 구성하고 늙어서는 마을 구성원으로부터 돌봄을 받는다.

 

 정말 요람에서 무덤까지 개인이 걱정할 거리가 없다. 유일한 걱정거리라고는 실수나 범법행위로 인한 임무 해제라는 조치가 유일한 것 같다.

 

 하지만 그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이면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조너스의 직업이 된 기억 보유자라는 직업도 그런 것이다. 기억 보유자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의도적으로 제거된 감정, 기억 등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가지고 있는 직업이다.

 

 여기에는 행복한 기억도 있지만 트라우마로 남을 법한 지독한 기억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고작 12살 아이에게, 그것도 직업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다른 직업에 없는 규칙을 새롭게 만들면서 떠넘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물론 최대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보유자가 남과 기억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외로움과 끔찍한 기억들로 인한 괴로움을 제외한다면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꽤 특별한 대우를 받는 편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모든 사람이 부담을 느끼고 고통을 당할 거야. 사람들은 그걸 원하지 않아.

 

 책을 말미에 조너스는 마을을 떠난다. 그 행위로 인해 그동안 자신이 전달받은 기억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공유하게 됨으로써 혼란과 고통이 따를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기억을 전달해 주고 돌봐오던 가브리엘이 마을에서 요구하는 표준화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임무 해제라는 표현을 빙자한 살해를 당 할 것임을 알고는 미처 준비도 다 되지 못한 상태에서 급히 마을을 떠난다.

 

 마침내 완전히 구속과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조너스는 과연 행복해졌을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조너스가 기억 보유자로 선택되고 잃어버렸던 감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는 과연 나는 고민이나 위험 같은 것이 없는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포기할 수 있을까? 였다.

 

 물론 '늘 같음 상태'라는 게 애매모호하니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아주 많은 돈으로 치환해서 생각한다면 이미 사회에 찌들어버린 나 같은 어른들은 생각하기가 좀 더 수월할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우리는 이미 조너스의 마을 같은 삶에 꽤나 근접해 있지 않은가였다.

 

 안정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직장에 나가서 통제를 받고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감정을 죽여버린 채 일을 한다. 개성이 중요하다고 외치긴 하지만 인스타 등을 보며 남들처럼 살지 못해 우울해하거나 그들의 흔적을 좇아간다.

 

 사랑이 아닌 타인에 판단에 의한 결혼은 사실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너스의 마을 사람들은 태어난 이후로부터 훈련되고 교육되어 애초에 가지지 못했고 주변인들도 없기에 결핍을 느끼지 못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다. 우린 가졌던 것을 잃기도 하고 아니면 남들이 한없이 많이 가진 것을 바라보기만 하며 결핍과 분노 같은 것을 느끼고는 한다.

 

 어느 쪽이 더 불행한 걸까?

 

 조너스는 가브리엘과 마을을 탈출해 부상과 굶주림에 시달린다.

 

 그러나 조너스은 마을에 머물렀다면 가브리엘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죽었을 것이며 자신은 감정, 색깔, 사랑 등에 굶주리며 평생 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너스와 가브리엘은 계속해서 추위와 배고픔, 부상에 시달리며 약해진다.

 

 그리고 포기하고 싶을 때면 기억 전달자로부터 받은 기억을 가브리엘과 나누며 앞으로 나간다. 따뜻함의 기억, 행복함의 기억 등 괴로울 정도로 짧지만 그것들이 조너스를 멈추지 않고 나아가게 해 준다.

 

 

 기억과 감정은 한 사람을 고통과 절망에 빠트리기도 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미 지나가 버렸기에 해결할 수도, 별 일이 아닐 수도 있는 문제도 기억과 감정이 섞이면 그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게 해주는 것은 한 조각의 작은 행복한 기억 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것들을 배제하고 극도로 효율적인 삶만을 추구하는 세계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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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마치 영화 메트릭스나 이퀄리브리엄을 떠올리게 하는 이 디스토피아적 SF소설은 읽고 난 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무려 1932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지금 봐도 놀랍도록 생생하게 묘사된 인공부화장의 모습이나 소설 전체의 줄거리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언젠가 한번 읽어 보려고 했던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조금 우습게도 얼마전 유발 하라리가 발간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그가 미래는 '1984'가 아니라 '멋진 신세계' 처럼 될 것이라는 한토막의 글을 읽고 호기심이 생겨 읽어 보게 되었다.

 

 책은 또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의 명작이라 할 수 있는 '1984' 와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가 된다. '1984'가 태어난 사람에 대한 사상교육과 선전 그리고 완벽한 빅브라더의 감시를 통해 사람들을 강제로 통제하고 억압을 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유지한다면 '멋진 신세계'는 훨씬 세련된 방법으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바로 아예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목적에 맞게 '만드는' 것이다.

 

 이 외에도 사회 혹은 군중에 대한 통제라는 목표점은 똑같지만 방식은 전혀 다른 두 책에 대한 비교는 나중에 말미에 해보도록 하자.

 

2. 줄거리

 

 대전쟁 이후 거대한 세계정부가 들어서고 모든 아이들은 인공 수정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들의 교육 및 양육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고 실시한다. 인공 수정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삶은 목적, 계급이 정해지고 그에 맞춰 지능과 육체적 특성이 정해지게 된다.

 

 아이들은 이미 태아시절 부터 세뇌를 받기 시작하게 되고 자신의 신분이나 직업에 대한 불만을 전혀 가지지 않도록 자라나게 된다. 심지어 가장 하층 계급인 엡실론은 고의로 지적장애를 가진 채 태어나게 해 단순 반복 노동을 담당하게 만든다.

 

 지능과 육체뿐만이 아니다.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항목은 욕망이다. 정부는 개인의 욕망마저 통제한다. 부모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하고 임신은 불필요 한 것으로 만든다. 소비와 육체적 쾌락은 미덕으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시행되어온 세뇌로도 부족해 괴로움이나 고민을 조금이라도 할라치면 마약의 일종인 '소마'를 복용하게 만들어 행복감과 안정감을 가지게 한다.

 

 이 사회에서 높은 계급인 알파 플러스로 태어난 버나드 마르크스는 불만을 가지며 외톨이 생활을 이어가다 연인인(이 사회에서 연인이란 솜털처럼 가벼운 관계이다.) 레니나와 함께 연구라는 명목으로 아직 문명화가 되지 않은 야만인 거주구역으로 들어가 존이라는 남자를 만나고 그를 런던으로 데려오고 존과 함께 갑작스레 유명인이 되어버린 버나드 마르크스는 본격적으로 사회를 즐기기 시작한다.

 

3. 멋진 신세계와 1984

 

 멋진 신세계와 1984는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해 사회를 통제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1984가 도청 등을 통한 엄밀한 감시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고 일반 군중들에게 서로 연결되지 말고 분리 될 것과 절제할 것을 요구한다면 멋진 신세계에서는 결코 군중과 분리 되지 말기를 그리고 끊임 없이 소비하고 행복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두 소설에는 배경적 차이가 있으니 무엇이 더 옳으냐는 당연히 따질 수 없는 노릇이지만 두 소설 모두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예견한 것이니 과연 어느 쪽이 더 들어 맞을지는 궁금한 노릇이다.

 

4. 마무리

 

 책에서 묘사된 사회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스쳐지나가며 보기엔 참 멋진 신세계다 라고 감탄을 터트릴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하고 평화로운 세계, 실업자도 없고, 갑에게 고통을 받는 을 역시 없다. 다들 충만한 행복감만을 느끼며 가끔 괴롭거나 우울 할 때면 그들의 구호처럼 소마 한개면 충분하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도 든다. 과연 그것이 인간일까? 두려움도 고통도 느끼지 않고 직장에서는 주어진 일만 처리하고 사회에서는 의무처럼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모습은 과연 저것이 기계와 무엇이 크게 다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미숙하기 때문에 쓸모가 없어서 낭비되는 오랜 기간, 만일 암소만큼 육체적인 발육 기간을 단축시킬 방법만 있다면 사회를 위해 얼마나 큰 공헌이 되겠는가!

 

 기계는 돌아가고, 돌아가고, 계속해서 영원히 돌아가야만 한다. 가만히 서 있으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할 바는 다 해야 돼요. 누가 뭐라고해도 모든 인간은 서로 공유해야 하니까요.

 

 이제는 어찌나 크나큰 발전이 이루어졌는지 노인들도 일을 하고, 성행위를 하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길 짬을 낼 틈도 없고, 쾌락 이외의 시간이나 여유를 짜낼 수가 없으며...(중략)

 

 "일하는 시간 동안에만, 그리고 지적으로만 어른이죠". 그는 얘기를 계속했다. "감정과 욕망에 있어서는 아기들이지만요."

 

 책에 나타난 문장들은 책 속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란 기계부품과 비슷한것이다. 다만 때때로 기름을 치고 정비를 해줘야하는 기계처럼 여러 수단을 통해 그들에게 '행복감' 이라는 것을 선사해줌으로써 기계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톱니들과 연결되지 않은 부품들은 쓸모가 없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SNS가 등장한 이 후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도 혼자 있는게 아닌 것처럼 되버렸다. 한적한 곳에서는 사색을 즐기기보단 사진을 찍어 공유를 하거나 멍하니 쉬는 시간을 공백이라 여기며 불안해한다. 그리고 풍족해진 먹거리와 컨텐츠들은 우리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것만 같다.

 

 누가 알겠는가 뇌과학과 가상현실이 계속 발전한다면 우리 뇌에 전극이라고 꼽고 다들 가상현실에 빠져 즐기고 있을지. 책에서 말한 것처럼 '행복이란 전혀 웅장하지 못하니까.'

 

 

다른 디스토피아적 소설 혹인 영화?

[독서 노트/고전] - 빅 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 "1984"

[영화] - 채피 - 인간에 대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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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어가며

 

 채피는 2015년 개봉작이니 꽤나 오래된 영화다. 포스터는 꽤나 귀여워 보이는 로봇에 온갖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고 벽에도 귀여운 그림들과 함께 총이 뉘여져 있는 걸로 봐서 굉장히 가볍고 발랄한 영화라는 느낌이나는터라 포스터를 보고 영화를 봤다면 분명 욕하는 사람이 많았을 꺼라고 생각되는 영화이다. 엄청나게 디스토피아적인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를 보는 감상을 표현하자면 마치 너른 밭에서 감자를 캐내듯 영화 장면과 대사 곳곳에 숨겨져있는 감독의 메세지를 드러내고 고민을 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즐거운 영화였다. (즐겁다 라고 하기엔 주제가 좀 무거운 것 같은게 사실이다.)
 
 이 때는 알파고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이니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제는 영화의 모습들이 일부분은 현실로 실현이 된터라 좀 더 마음이 무겁다. 지금도 A.I가 인류를 구원 할 것인지 인류를 위협할 것인가를 부터 시작하여 여러가지로 A.I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영화를 보고 나도 문득 궁금해졌다.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의 예측처럼 A.I가 특이점을 넘어선다면 과연 무엇으로 A.I와 인간을 구분 할 수 있을까?
 

2. 신화

 

 등장 인물들을 뜯어 보면 참 재미있다. 먼저 채피의 원형인 로봇 스카우트의 제작자이자 채피의 A.I 설계자인 디온은 마치 신을 연상시킨다. 그는 기존 인간이 혹은 산업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해(계속 되는 파손으로 인해 복구에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상황) 폐기 처분 위기에 놓인 22호를 사장의 지시를 어기고 빼돌려 자신이 개발한 A.I를 장착시킨다.

 
 그리고 그는 곧 채피를 자신을 납치한 갱단에게 빼았기는데 그 와중에도 채피에게 자신이 그를 창조한 창조주임과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희망, 그리고 인간을 해치지 말라는 약속을 하게 한다. 마치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곧장 갱단에게 채피를 빼앗기는데 그들 (특히 아메리카와 닌자)의 모습은 마치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하는 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디온과 대치하는 빈센트는 마치 창조론의 수호자처럼 보인다. 자율적인 A.I를 부정하고 그림을 그리는 채피를 발견하고 성호를 그은 그는 채피를 잡았을 때 그의 머리에 든 것은 데이터 덩어리일 뿐이라고 소리친다.

 

3. 채피

 

 영화는 당연히 채피를 빼놓고 말을 할 수 없다. 채피의 모습은 완전히 인간을 연상시킨다. 하긴 개발자인 디온의 목표가 당연히 인간처럼 느끼고 생각하는 A.I 였으니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그리고 마치 인간처럼 주변에 관계된 인간들을 변화시키기까지 한다.
 
 소심하고 나약해보이던 디온은 총을 들게 했고 거칠고 악의만 가득차 보였던 욜란디는 '마미'를 자청하게 만들고 그를 아기처럼 돌보게 한다. 종국에는 처음에는 채피를 도구로 물건으로만 다루었던 닌자조차 말뿐이 아닌 진짜 '파더'로 행동하게 만든다. 현금 수송차를 털고 새로운 몸을 줄 수 없다고 고백하고 그 사실을 안 채피가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따지 듯 왜 거짓말을 했냐고 격렬하게 항의하는 채피에게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고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짓는 닌자를 보며 연출한 감독에게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압도적인 악의를 보이며 마치 성전을 치루며 악을 정화를 행하는 듯 잔혹한 행동을 서슴치 않으며 자신의 '마미'를 죽인 빈센트를 공격하는 모습은 영화를 지켜보고 있는 나마저 로봇이 인간을 공격하는 모습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하게 동조 시키게 만들었다. 정리하자면 빈센트보다 오히려 채피가 더 인간다워 보였다.
 
 채피는 다른 로봇들과 달리 애초에 수명이 정해져있었다. 배터리 손상으로 인해 수명은 단 5일, 태생부터 굉장히 인간답다.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답게 영생을 꿈꾼다. 자신을 불완전하게 탄생시킨 디온(신 혹은 설계자)에게 항의하고 디온이 불가능하다고 한 마음을 옮기는 일까지 해낸다.
 

 

4. 과연 무엇이 인간인가?

 

  채피가 아직 세상을 제대로 알기전 욜란디가 읽어주던 책에서는 검은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채피에게 '겉모습이 다른것은 중요하지 않고 내 안에 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그게 널 다르게 만들어준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닌자의 손에 이끌려 나간 맞닥드린 세상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채피의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채피의 겉모습을 바라보고 로봇 경찰이라고 공포에 질리거나 경멸한다. 채피가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다. 채피가 완전히 성숙하고 주변은 채피를 인간적으로 받아 들였지만 양키와 빈센트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로봇일 뿐이었다.
 
 이 영화의 결말은 소름끼친다. 디온은 마음은 옮길 수 없음으로 채피가 다른 로봇으로 옮겨지면 더 이상 같은 로봇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견해는 채피를 처음부터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던 마미 욜린다고 마찬가지다. 그런데 영생에 대한 욕망으로 마음을 옮기는데 성공한 채피는 그 첫번째 대상으로 죽어가는 디온을 로봇으로 옮긴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디온은 살아 있었고 자신이 로봇의 몸에 들어 갈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미 과연 그 디온이 이 디온인지 그냥 복제된 데이터인지에 관한 의문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소름돋는 건 그 다음이다.
 
 닌자를 구하기 위해 죽은 욜란디, 어찌보면 사랑하는 이를 위한 죽음이라는 굉장히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육신은 땅아래 묻힌다. 그런데 채피가 그녀의 마음의 백업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다. 욜란디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영혼은 이미 먼곳으로 떠난 상황, 그렇다면 USB에 담긴 그녀의 마음 무엇일까?
 
 채피는 그녀의 마음 백업데이터를 이용해 그녀를 살려낸다. 그녀의 모습은 좀 더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채피는 말한다.
 

"이젠 우린 둘다 검은양이야"

 

 조금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부활한 욜린다는 채피보다 조금 더 인간적일까? 아니면 모두가 채피 같은 모습이 되면 채피가 가장 인간적일까?

 

5. 마치며

 

 지난 여름에 레리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를 읽었었다. 문과인 나에게는 외계어가 쓰여진 것 같은 더럽게 어려운 책이 었다. 책에는 여러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인간은 육신을 벗어던지고 데이터가 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예건이 되어있었다. (내가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그때는 최근 영화였던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는 로봇몸에 들어가 디온을 떠올리게 되었다. 과연 로봇의 몸에 들어가서 말하는 디온은 정말 인간 디온일까? 아니면 디온의 데이터일까?
 
 문득 '우리는 객체이자 주체로써 서로를 투사한다.' 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아직까지는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은 인간끼리 서로 증명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A.I가 더 자연스러워지고 모두 채피와 같은 모습이 되면 채피가 인간이 되는 것일까?
 
 검은양이 농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면 과연 양은 검은색일까 흰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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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말, 우리 서점을 강타했던 사피엔스의 후속작인 '호모데우스'가 출간 되었다. '사피엔스'가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라는 3가지 주요 혁명을 통해 어떻게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책이었다면 이번 '호모 데우스' 는 그 이후를 주로 다루고 있다. 과연 앞으로 인간에게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터미네이터나 메트릭스 처럼 기계들에게 지배당하는 세상일까? 아니면 노동에서 해방되어 모든 인간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유토피아가 펼쳐질까? 유발 하라리가 상상하는 미래를 엿보고 싶다면 책을 펼쳐보기를 바란다.

 

호모 데우스
국내도서
저자 :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 김명주역
출판 : 김영사 2017.05.15
상세보기

'호모 데우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

1. 탁월한 이야기꾼 유발 하라리, 역사학자가 바라보는 미래

2. 우리가 인간으로써 나아가야할 다음 스텝은 어디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 

 

 일단 책이 무진장 두껍다. 600 페이지가 넘으니 펼치기도 전에 질린다는 감정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읽다보면 그의 방대한 지식과 유려한 글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이야기가 그의 손을 거치며 쉽게 바뀌어 있어 생각보다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호모데우스'는 인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3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초반 부분은 약간 '사피엔스'와도 연계가 되는 부분이지만 굳이 '사피엔스'를 읽지 않아도 큰 무리가 없다.

내 마음대로 고른 주요 Keyword

1. 인류의 다음 욕망은 어디인가?

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를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고대부터 많은 정복자 혹은 지배자들은 영생과 젊음을 꿈꾸었다. 중국에는 진시황제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영생을 이루기 위해 종교나 신화에 혹은 인간을 초월한 신비로운 무언가에 기대었다면 지금은 과학에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 과연 인간은 그것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인간은 혹은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더 이상, 밤이되면 어두운 동굴속에 숨어서 야생 동물의 침입을 두려워하며 잠이들던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모든 동물들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제는 에이즈나 에볼라와 같은 자연재해와의 싸움에서도 서서히 승기를 잡아가고 있다. 이제 인간에게 더 위험 한 것은 전염병이나 야생동물 혹은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 들이다.

 

 현재 사회구조와 과학기술의 복잡도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 누구도 정확하고 완벽한 큰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세계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역시 우리는 향후 발전에 대해 브레이크를 잡을 수 조차 없다.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끊임 없는 성장을 갈망한다. 이제는 성장이 유지 되지 않으면 국가도, 경제도, 산업도 유지가 될 수 없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하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지만 결국은 이러한 무한성장에 기반한 경제는 결국 끝을 맞이 할 수 밖에 없을 텐데. 이런 우리에게 불멸, 행복, 신성이라는 목표는 더 없이 완벽한 프로젝트일 것이다.

 

 영원한 젊은과 불멸은 어느날 갑자기 인간이 꿈꾸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인간이 꿈꾸어 왔던 것이다. 다만 과거에는 신적인 존재에게 그 소망을 빌었다면 지금은 생물학과 같은 과학에 기대를 걸고 있을 뿐이다. 현재는 여러가지 도덕적 이유로 앞서 말한 것들에 도전하는 생명공학 같은 것을 제한하고 있지만 상기 기술했던 이유로 인해 계속해서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쨋든 도래할 신기술이라면 그 용도를 선택할 수 있음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이해하고 그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정하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2. 인류는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인간이 다른 동물들을 제치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바로 인지혁명을 통해 낯선 사람들과도 매우 유연한 방식으로 협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피엔스가 이를 통해 창조 해낸 상호주관적인 실재는(돈이나 국가 같은 것) 막강한 힘을 발휘했고 결국은 세계를 지배하게 명분을 만들었다.

 

 사피엔스가 만들어낸 상호주관적인 실재의 걸작 중 하나인 종교는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 자연을 지배할 강력한 명분을 제공하였다. 종교는 사피엔스의 존재 이유를 부여하고, 사피엔스와 다른 동물들 구분짓고 권위를 부여하여 다른 동물들 위에 올라 설 수 있게 했다.

 

 사피엔스는 이 상호주관적인 실재를 끊임 없이 개편했다. 애니미즘은 신을 받드는 종교로 진화하고 되고 종교가 자리잡았던 곳에 의심이 피어나자 인본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사피엔스가 상호주관적인 실재를 통해 만들어낸 것 중 가장 걸작중 하나가 과거에는 종교이고 현재에는 돈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려고 그것들을 발명 하였으나 그것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고 있다. 종교는 우리에게 종교전쟁과 마녀사냥이라는 비극을 안겨주고 돈은 빈부격차와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라는 슬픔을 안겨주고 있다.

 

 그런데 과학이 발전하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그동안 믿어왔던 혹은 상호 합의되어 왔던 사실들 또는 상호주관적인 실재에 의구심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과연 인간은 영혼이 있는가? 개인적 자아는 존재하는가?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등이다.  

 

이렇게 상호주관적인 실재들을 창조하는 능력은 인간을 다른 동물들에게서 분리할 뿐 아니라, 인문학을 생명과학에서 분리한다.

3. 사피엔스의 미래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발전해왔고 다음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했으니 어떻게 그곳으로 갈지를 정한다면 다음 미래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마구 줄여놨으니 리뷰상 부족하고 생략된 부분이 많지만 이해하기를 바란다.

 

 저자가 바라보는 미래는 꽤나 디스토피아적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현재의 우리의 관점에서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향후 우리를 지배할 상호주관적인 실재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예측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지금도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 동안은 신이 혹은 인간 개인 스스로가 선택하고 이루었다고 믿는 것들을 (행복, 평화 등) 첨단기술이 이루어 줄 것이라고 믿는 신흥 기술종교가 그것이다.

 

 신흥 기술종교들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기술 인본주의와 데이터 종교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가급적 직접 책을 읽고 보고 평가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기술 인본주의는 인간을 개조 혹은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반응을 통제하는 형태로 행복을 느끼게 하고 집중력을 높여 효율성을 높인다. 데이터 종교의 경우에는 모든 인간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상태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최근 개봉한 영화 공각기동대의 전뇌와 유사하다고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4. 마치며

 과연 앞으로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바둑으로 꺽으면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들이 인간을 대체 할 것임으로 그것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호모 데우스는 그것에서 한 발 더 나가있다. 과연 그 세계에서 인간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좀 더 무서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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