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소설 속 안나가 자신을 우주정거장에서 퇴거시키기 위해 방문한 직원을 향해 넋두리처럼 하는 말이 이 책에서 가장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갈 방법이 사라진 슬렌포니아 행성과 그곳에 가기 위해 폐쇄 된 우주 정거장에 머무는 안나의 모습은 마치 오늘 날 쇠락한 산업지대와 케케묵은 냄새를 풍기며 젊은이들의 일을 방해하는 취급을 받는 노인 세대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한 때, 누구보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선도 하였을 그들은 무섭도록 빠르게 발전하고 변해가는 과학기술과 경제성, 효율성이라는 논리에 치여 서서히 녹이 슬어가는 쇠처럼 외면 되어왔다.
효율을 명목으로 각종 매장에 설치 된 키오스크를 보며 난생 처음 보는 기계에 난감해 하는 어르신의 모습과 그 등 뒤에서 자신의 차례가 늦어지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팔짱을 낀 채, 눈을 찡그리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객이 어떻게 행동하든 묵묵히 미리 입력된 반응을 내놓는 키오스크처럼 과학기술에는 감정이 없다.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것만 물려주고 싶어 릴리가 연구했던 배아 디자인 연구가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그녀와 같은 이들을 더욱 차별 받는 세상을 만든 것처럼 과학기술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 의해 그 모습이 결정 된다.
미국에서는 자신의 기업의 이윤을 위해 높이기 위해 그 기업이 생산하는 약의 가격을 하루아침에 크게 올려 사람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은 기업가가 있다.
그 기업가의 사례를 떠올리면 현대 과학기술은 돈다발을 엮어 만든 거대한 수레바퀴를 수많은 사람들이 밀고 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구를수록 점점 커지는 수레바퀴에 서너 명쯤 깔려 죽고, 주변을 파괴한다고 해도 더 높은 이윤과 경제성, 혁신 등을 구호로 외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폭력적인 모습을 상상하면 기가 질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분별한 과학의 발전 끝에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소설은 거기에 대해 은근한 반론을 끼어 넣는다.
릴리가 지구에서 행했던 배아 디자인 연구의 결과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태어날 때부터 계층이 정해지고 계층에 따라 완벽하게 분리가 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올리브를 위해 만든 편견도 차별도 없는 유토피아적 마을 역시 그녀의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변한다.
올리브는 자신을 쉽게 받아들이고 납득해주는 세상 대신 자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가득한 세상으로 내려가 릴리의 흔적을 쫓던 중 그곳에서 사랑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며 차별에 저항하는 삶을 살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녀의 후손들 역시 순례자가 되어 사랑을 찾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한다.
이것은 책 속에서만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진 이후 많은 개인들이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이용해 코로나 관련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사비를 들여 서버를 운영하며 배포하기도 했다.
안나를 슬렌포니아 행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릴리와 올리브를 차별한 것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인간들이었다. 결국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마음을 가지지 못한 과학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인간 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제성이나 효율성 같은 집단적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서로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 할 수 있다면 유토피아적인 세계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과연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 할 수 있을까? 사실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인종간의 대립을 바라보면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다. 이런 갈등은 인종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대 간, 지역 간의 등의 갈등이 심각하다.
작가는 이 질문에도 소설을 통해 희망을 전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면 서로를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이유로 서로 이해하기를 포기 한다면 안나의 말대로 인류가 외연을 확장하는 동안 버려진 사람은 점점 늘어 날 뿐일 것이다.
저자의 소설은 타자를 이해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가깝게는 죽은 어머니를, 그리고 나와 공생을 하고 있었지만 알지 못했던 존재를, 멀게는 언어 체계도, 수명도, 그리고 생김새도 전혀 다른 외계인과 관계를 맺거나 이해를 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스펙트럼에서 여성생물학자였던 희진은 외계 행성에서 조난당해 루이라는 존재에게 구조 된 후 함께 생활을 한다. 루이를 만난 초기 희진은 과학적인 장비들이 없어 루이의 말과 행동을 해석 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름의 방식으로 루이를 이해하고 감각한다. 그리고 지구로 귀환한 이 후, 손녀에게 루이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생물이다.”라고 말을 한다. 낯설기만 했던 이방인이 그녀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존재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갈등이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피부색도, 종교도, 언어의 차이도 아니다. 갈등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가 부족한 것에 가장 큰 원인은 서로 간에 시간을 들여 알아가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과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을 바라보는 일종의 선입견 때문 일 것이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문명은 낯선 문명과 만나면 서로를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폭력을 통해 자신의 문명이 옳음과 강함을 증명하려 했다. 그에 비해 희진과 루이의 만남은 서로를 이해할 수단은 굉장히 제한적이었지만 폭력적이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에 가까운 조우였다. 덕분에 희진은 지구인의 연구라는 관점에서 루이를 관찰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시간을 들여 루이를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지구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것들까지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국가나 회사 등의 집단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개인으로 전 세계에 스스로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랍의 봄’등 개인들이 모여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전 세계가 ‘컨택트’될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세상이 코로나19가 세상에 등장 한 후로는 ‘언택트’가 전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에는 가까운 사람과 얼굴을 마주보며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흘러 간 노랫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를 잠재울 수 있는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면 이 혼란이 수그러들고 이전과 같은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또 많은 이들이 우리는 이전과 같은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얼마나 이 혼란이 지속 될지, 그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예상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되었건 간에 경제성과 효율성이라는 논리로 이 혼란을 다루기만 한다면 필연적으로 소외 된 사회적 약자들이 큰 희생을 치를 것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있을까?
특수 상대성이론에 따른다면 질량을 가진 물체는 빛의 속도에 도달 할 수 없기 때문에 위의 물음은 현재는 불가능하다고 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을 포기하고 안나의 말처럼 뒤처지고 배제되어 소외되는 사람을 만들며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가야만 할까?
안나는 자신과 함께 지구로 돌아가기를 권하는 직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과학자였던 안나는 자신이 슬렌포니아에 도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대답은 합리적이지 않다. 다만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하고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과학기술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해결을 위해 개인이라는 존재가 배제 된 채, 경제성과 효율만을 추구해 이루어낸 문제 해결은 진정한 문제 해결이 아닌 누군가의 희생으로 쌓아올린 일시적인 방패막이 일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빛의 속도에 도달 할 수 없을지는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혼돈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있는 길은 서로가 서로를 향한 마음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 뿐일지 모른다. 순례자들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듯, 안나가 슬렌포니아로 돌아갈 것을 포기하지 않듯 말이다.
'독서 노트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5 도살장 - 커트 보니것 (0) | 2021.02.19 |
---|---|
숲과 별이 만날 때 - 글랜디 밴더라 (0) | 2021.02.03 |
아이반호 - 월터 스콧 (0) | 2020.08.13 |
페스트 - 알베르 까뮈 (0) | 2020.02.24 |
감정일까, 진심일까 '아몬드' - 손원평 (0) | 2020.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