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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주, 아니 거의 대부분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날 확률을 과소 평가하고 행운이 찾아 올 확률을 과대 평가하고는 한다.

 

 그래서 벼락 맞을 확률보다 당첨 확률이 낮다는 로또는 매주 사면서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확률로 사고가 날 수 있는 자동차는 거의 매일 타고 다닌다. (내 이야기다.)

 

 물론 이런 걸 일일이 따지고 살면 거의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발생 확률이 0이 아니라는 것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야기 하려는 책은 확률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소설 책을 읽는 재미는 발생 확률이 0%가 아닌 일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현실은 소설 보다 더 하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들어가며

 

 이 책은 자본과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민간에 전해지는 오래 된 설화 속 저주 같은 RB 바이러스, 인간과 흡사한 로봇, AI 선생님, 인체에 내장하는 ESC, 홀로그램북, 화성 관광 등을 통해 사실감을 부여하고 독자의 상상력을 고취시킨다.

 

 의문이 가득한 소년의 이야기가 한 꺼풀 한꺼풀 벗겨지고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가 끝에 다다랐을 때, 작가가 독자한테 원하는 감정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슬픔? 분노? 두려움? 그것도 아니라면 희망이었을까?

 

줄거리 요약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온몸이 새하얀 백색증을 앓고 있는 소년 마오가 다른 이들과 차단된 채 외딴 숲 속 집에 살고 있다.

 마오는 RB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태어났고 바이러스를 치료하고 살아남기 위해, 타인과 다른 자신의 삶을 수긍한다.

 치료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진솔이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다른 소년 하라를 집으로 데려온다. 

  

책의 줄거리

 

 시대는 근 미래,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는 안드로이드가 흔하고 인간은 달에 호텔을 짓고 화성에 정착할 첫 이주민을 뽑으려 하고 있다.

 

 고층 빌딩 숲이 평범한 시기에 울창한 나무로 둘러 쌓인 깊은 숲 속, 최첨단 설비를 갖춘 집에 온몸이 새하얀 소년이 자신의 메이드 로봇과 함께 단 둘이 살고 있다.

 

 백색증을 앓고 있는 소년의 이름은 마오.

 

 이제 16살이 된 이 알비노 소년은 달에 호텔 셀레나를 건설하고 운영에 성공한 거대한 그룹 회장의 유일한 손자이다.

마오는 연약하다. 햇볕을 받으면 알레르기 반응이 강하게 일어나고 먼지와 스트레스, 각종 자극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소년을 이렇게 연약하게 만든 근원은 소년의 부모가 사업을 위해 멸종상태에서 부활시킨 ‘레인보우 버드’가 가지고 있던 희귀한 바이러스, RB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서다.

 

 그 바이러스로 인해 소년의 부모 역시 모두 사망하지만 태아 상태에서 감염된 마오는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소년의 할아버지 회장은 온갖 변이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치료하고 소년을 살리기 위해, 소년을 깊은 숲 속의 집에서 외부와 차단 한 채 살아가게 한다.

 

 그리고 치료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마오는 자신과 같이 RB바이러스에 감염되었지만 생존한 자신보다 2살 많은 하라를 만나게 된다.

 

 평생 사람이라고는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돌봐 준 진솔을 제외하고 처음 다른 인간을 만나는 마오는 자기 삶에 대한 진실과 마주한다.

 

마치며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대표자 혹은 우리의 의견을 대신할 사람을 투표를 통해 뽑고 있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 체계는 분명 민주주의지만 우리의 실 생활에서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돈, 그러니까 물질적 자본이 가지는 힘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단순히 돈이 많은 것으로는 남들에게 존경을 받거나 유명해지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을 졸부라고 부르며 비꼬기도 했다.

 

 그렇지만 요즘은 좀 많이 달라졌다.

 

 돈이 많다면, 그 돈을 쓰는 것을 온갖 SNS 등에 올리며 자랑하는 행위가 유명세를 사고 그 유명세가 명성 또는 영향력을 가지는 시대다.

 

 이렇게 돈으로 해결 가능한 것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적절한 보상이 따른다면 감옥에 가는 것도, 그러니까 자유가 부당하게 억압받는 것도 가능하다고 설문조사에 응답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도덕관념은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변해왔다.

 

 인류 최고의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에 찬성했고, 여성 참정권을 부정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중 하나라는 세종대왕은 어머니가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는 노비종모법을 시행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사람들은 그런 시대에 영향을 받아 자라고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먼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어디까지 허용될까.

 

 돈은 이미 많은 것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인간이 멸종시킨 다시 부활시키는 것을 정당화한 것은 사업(=돈)을 위해서였다. 화성 첫 이주자 그룹에게는 그 이면에 무슨 저의가 숨겨져 알려주지 않고 살 곳과 지원금을 준다.

 

 막대한 기부금으로 사 온 아이의 인생 전부를 저당 잡고, 삶을 이어준다는 명목과 교묘한 속임수로 자신에게 일어난 부당한 일을 스스로 정당화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강압적으로 실험체로 사용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에는 나치, 일본에는 731부대가 있었고, 미국에서는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터스키기 실험이 있었다.

 

 아마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이 일을 말도 안 되는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일이 피해자에게 평생을 써도 다 못 쓸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벌인 일이라면?

 

 솔직히 말해서 내게 책과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상상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아니라 내 후대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실제로 한 부자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어마어마 한 돈을 소비한다.

 그 방법으로 젊은 자기 아들의 피를 수혈하는 처방도 받았다고 한다. 과연 이 방법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굳이 자기 자식뿐만 아니라 자기 몸에 맞기만 하다면 사람을 사서 하지 않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이렇게 한 단계씩 그 수위를 올려 나간다면 개인을 위한 인간 모르모트를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과연 우리는 아니 세상은 그것을 멈출 수 있을까?

 

 
테스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장시켜 줄 허블 청소년 시리즈의 첫 책은 30만 명의 독자들이 사랑한 베스트셀러 『페인트』를 쓴 이희영 작가의 장편소설 『테스터』이다. ‘누가 이토록 연약한 소년을 숲속에 홀로 방치해 두었을까’ 하는 미스테리한 질문 하나로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 작품은 장대하고도 아름다운 디스토피아 SF이다. 그와 동시에 이 소설은 세상과 유리된 채 불가항력에 이끌려 살아가는 먼지 같은 존재들을 위한 곡진한 진혼곡이기도 하다. 오래 전에 멸종된 오방새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함께 복원된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모두 죽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어린아이가 있다. 백색 소년 마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평생 숲속 집에 갇혀 메이드 로봇과 함께 산 이 외로운 소년에게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온다. 바로 RB 바이러스의 또 다른 생존자인 하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소년을 둘러싼 미스테리한 질문들을 파헤친 끝에 마오가 가닿은 반전은 두 소년의 위치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두 소년이 드러내는 슬프고 충격적인 진실은 독자들이 작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도록 한다.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소년들에게 과연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정교하고, 아름답고, 꿈결 같고, 왠지 슬프다. 매력적이고 여운이 긴 작품이다.” -장강명(소설가) “《페인트》와 《나나》를 잇는 또 하나의 명작이 탄생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이희영 작가가 빚어낸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정여울(문학평론가)
저자
이희영
출판
허블
출판일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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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소설 속 안나가 자신을 우주정거장에서 퇴거시키기 위해 방문한 직원을 향해 넋두리처럼 하는 말이 이 책에서 가장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갈 방법이 사라진 슬렌포니아 행성과 그곳에 가기 위해 폐쇄 된 우주 정거장에 머무는 안나의 모습은 마치 오늘 날 쇠락한 산업지대와 케케묵은 냄새를 풍기며 젊은이들의 일을 방해하는 취급을 받는 노인 세대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한 때, 누구보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선도 하였을 그들은 무섭도록 빠르게 발전하고 변해가는 과학기술과 경제성, 효율성이라는 논리에 치여 서서히 녹이 슬어가는 쇠처럼 외면 되어왔다.

 

 효율을 명목으로 각종 매장에 설치 된 키오스크를 보며 난생 처음 보는 기계에 난감해 하는 어르신의 모습과 그 등 뒤에서 자신의 차례가 늦어지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팔짱을 낀 채, 눈을 찡그리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객이 어떻게 행동하든 묵묵히 미리 입력된 반응을 내놓는 키오스크처럼 과학기술에는 감정이 없다.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것만 물려주고 싶어 릴리가 연구했던 배아 디자인 연구가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그녀와 같은 이들을 더욱 차별 받는 세상을 만든 것처럼 과학기술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 의해 그 모습이 결정 된다.

 

 미국에서는 자신의 기업의 이윤을 위해 높이기 위해 그 기업이 생산하는 약의 가격을 하루아침에 크게 올려 사람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은 기업가가 있다.

 

 그 기업가의 사례를 떠올리면 현대 과학기술은 돈다발을 엮어 만든 거대한 수레바퀴를 수많은 사람들이 밀고 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구를수록 점점 커지는 수레바퀴에 서너 명쯤 깔려 죽고, 주변을 파괴한다고 해도 더 높은 이윤과 경제성, 혁신 등을 구호로 외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폭력적인 모습을 상상하면 기가 질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분별한 과학의 발전 끝에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소설은 거기에 대해 은근한 반론을 끼어 넣는다.

 

 릴리가 지구에서 행했던 배아 디자인 연구의 결과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태어날 때부터 계층이 정해지고 계층에 따라 완벽하게 분리가 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올리브를 위해 만든 편견도 차별도 없는 유토피아적 마을 역시 그녀의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변한다.

 

 올리브는 자신을 쉽게 받아들이고 납득해주는 세상 대신 자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가득한 세상으로 내려가 릴리의 흔적을 쫓던 중 그곳에서 사랑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며 차별에 저항하는 삶을 살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녀의 후손들 역시 순례자가 되어 사랑을 찾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한다.

 

 이것은 책 속에서만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진 이후 많은 개인들이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이용해 코로나 관련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사비를 들여 서버를 운영하며 배포하기도 했다.

 

 안나를 슬렌포니아 행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릴리와 올리브를 차별한 것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인간들이었다. 결국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마음을 가지지 못한 과학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인간 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제성이나 효율성 같은 집단적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서로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 할 수 있다면 유토피아적인 세계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과연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 할 수 있을까? 사실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인종간의 대립을 바라보면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다. 이런 갈등은 인종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대 간, 지역 간의 등의 갈등이 심각하다.

 

 작가는 이 질문에도 소설을 통해 희망을 전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면 서로를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이유로 서로 이해하기를 포기 한다면 안나의 말대로 인류가 외연을 확장하는 동안 버려진 사람은 점점 늘어 날 뿐일 것이다.

 

 저자의 소설은 타자를 이해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가깝게는 죽은 어머니를, 그리고 나와 공생을 하고 있었지만 알지 못했던 존재를, 멀게는 언어 체계도, 수명도, 그리고 생김새도 전혀 다른 외계인과 관계를 맺거나 이해를 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스펙트럼에서 여성생물학자였던 희진은 외계 행성에서 조난당해 루이라는 존재에게 구조 된 후 함께 생활을 한다. 루이를 만난 초기 희진은 과학적인 장비들이 없어 루이의 말과 행동을 해석 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름의 방식으로 루이를 이해하고 감각한다. 그리고 지구로 귀환한 이 후, 손녀에게 루이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생물이다.”라고 말을 한다. 낯설기만 했던 이방인이 그녀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존재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갈등이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피부색도, 종교도, 언어의 차이도 아니다. 갈등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가 부족한 것에 가장 큰 원인은 서로 간에 시간을 들여 알아가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과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을 바라보는 일종의 선입견 때문 일 것이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문명은 낯선 문명과 만나면 서로를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폭력을 통해 자신의 문명이 옳음과 강함을 증명하려 했다. 그에 비해 희진과 루이의 만남은 서로를 이해할 수단은 굉장히 제한적이었지만 폭력적이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에 가까운 조우였다. 덕분에 희진은 지구인의 연구라는 관점에서 루이를 관찰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시간을 들여 루이를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지구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것들까지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국가나 회사 등의 집단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개인으로 전 세계에 스스로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랍의 봄등 개인들이 모여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전 세계가 컨택트될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세상이 코로나19가 세상에 등장 한 후로는 언택트가 전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에는 가까운 사람과 얼굴을 마주보며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흘러 간 노랫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를 잠재울 수 있는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면 이 혼란이 수그러들고 이전과 같은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또 많은 이들이 우리는 이전과 같은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얼마나 이 혼란이 지속 될지, 그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예상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되었건 간에 경제성과 효율성이라는 논리로 이 혼란을 다루기만 한다면 필연적으로 소외 된 사회적 약자들이 큰 희생을 치를 것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있을까?

 

 특수 상대성이론에 따른다면 질량을 가진 물체는 빛의 속도에 도달 할 수 없기 때문에 위의 물음은 현재는 불가능하다고 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을 포기하고 안나의 말처럼 뒤처지고 배제되어 소외되는 사람을 만들며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가야만 할까?

 

 안나는 자신과 함께 지구로 돌아가기를 권하는 직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과학자였던 안나는 자신이 슬렌포니아에 도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대답은 합리적이지 않다. 다만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하고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과학기술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해결을 위해 개인이라는 존재가 배제 된 채, 경제성과 효율만을 추구해 이루어낸 문제 해결은 진정한 문제 해결이 아닌 누군가의 희생으로 쌓아올린 일시적인 방패막이 일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빛의 속도에 도달 할 수 없을지는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혼돈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있는 길은 서로가 서로를 향한 마음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 뿐일지 모른다. 순례자들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듯, 안나가 슬렌포니아로 돌아갈 것을 포기하지 않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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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때가 때라서 그런지 오랜만에 페스트를 다시 읽게 되었다. 같은 까뮈의 소설이긴 하지만 이방인을 읽은 사람에 비해 페스트를 읽은 사람을 만나본 일은 거의 없다. 아무래도 노벨 문학상의 영향일까? 라고 생각하기에는 두 책이 주제는 비슷하지만 굉장히 다르다. (일단 두께부터가 페스트가 압도적으로 두껍다.)

 

 그리고 혹시나 페스트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나 묘사를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책에서는 인간에게 갑작스레 가해지는 부조리 혹은 악으로써 페스트라는 질병을 택하고 질병에 저항하는 개개인의 인물이 중점을 맞춰 써져있다.

 

 만약 정말 흑사병이 중세 유럽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 읽고 싶다면 존 켈 리가 지은 흑사병 시대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참고 이 책은 절판 되어 일반 서점에 팔지는 않는다. 운이 좋다면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고, 영어에 자신이 있다면 “The Great Mortality” 라는 원서를 읽으면 될 것이다. (구글북에서 ebook으로도 판다.)

 

2. 책의 줄거리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단순하다. 어느 날, 오랑시에 쥐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불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어 오랫동안 잊혀졌던 병이 잘 작동하는 시계의 추처럼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을 영위하던 오랑시의 시민들은 덮친다. 시민들은 사라졌을 것이라 믿었던 병이 오랑시에 나타나자 큰 혼란에 빠진다.

 

 책은 이 혼란스러운 도시에서 몇몇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의사인 리외이다. 그러나 때가 때이니만큼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파늘루 신부이다. 그는 페스가 확산되고 사망자가 늘어 갈수록 위기 극복을하기 위해 신앙에 의존해야 된다고 소리를 높인다.

 

 페스트는 사악한 자들에게 가해진 신의 징벌이라 설교를 하며 신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 순종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페스트가 지속되고 자신의 눈앞에서 아무런 죄 없는 어린 오통의 아들이 밤사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스스로의 말이 설득력을 잃어 버린 것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을 완전히 놓지는 않는다. 그는 페스트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십자가를 꼭 쥐고 의사의 진료를 거부하며 죽어간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화자인 리외는 까뮈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물에 가까울 것이다. 의사인 그는 특별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의사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비루한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페스트가 오랑시를 덮치자 무기력해보이던 리외가 점차 변해간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파괴하는 거대한 부조리에 대항해 점차 현실주의자로 변해간다.

 

 그는 인간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에 부조리함을 느끼지만 그것보다 더 페스트라는 병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듯 죽어나가는 것이 더욱 부조리하다고 여긴다. 리외에게 페스트라는 질병은 파늘루 신부의 페스트처럼 추상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현실에 엄연히 실존하고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무참히 파괴하는 현실이었다.

 

 그는 신의 구원을 바라지 않고 페스트에 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페스트에 걸린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병을 옮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페스트에 걸렸다면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리외 외에도 그랑, 타루,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여기며 도시에서 탈출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랑베르까지 페스트에게 투쟁을 한다.

 

 전염병은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하며, 자원봉사대는 모두에게 열려있다고 말했다.

 

 물론 스스로와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 있는가하면 이 혼란을 일으킨 페스트를 사랑하고 이용하는 인물들도 등장한다.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결정을 미루는 관리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이 혼란한 와중에 이익을 얻고 오히려 평온함을 느낀다.

 

 그 중하나가 코타르이다. 페스트가 발생하기 전 자살을 시도했던 코타르는 페스트로 인해 도시가 혼란에 빠지고 자신의 자살을 하려고 했던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페스트가 끝나가는 것을 무척이나 안타까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그쪽하곤 상관 없어요.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라면... 결국 하나 명백한 것은 우리가 페스트와 함께 지낸 날부터 나는 여기가 참 좋다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하지만 시내에는 탈진하거나 낙담해 보이지도 않고 만족감의 살아 있는 표상으로 남아 있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코타르였다.

 

 그는 혼자서 죄수가 되는 것보다는 모두와 함께 포위당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

 

 페스트가 거의 끝나갈 때쯤, 이 도시의 시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도적으로 사람들을 조직하고 이끌며 영웅적인 활약을 보였던 타루가 페스트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허탈한 웃음이 나올 정도로 부조리하다.

 

 그리고 페스트는 나타날 때처럼 갑자기 끝이 난다.

 

 고양이, 지난봄 이후로 처음으로 보는 고양이였다.

 

 마지막으로 리외는 페스트가 언제나 또 다시 우리를 찾아 올 수 있음을 경고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3. 마치며

 

 책에 나오는 페스트처럼 코로나19는 언젠가는 잠잠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얼마나 오래 우리 주변에 머물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빼앗아가고 상처를 남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각자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돌아봐야하는 때인 것 같다. 적어도 코타르처럼은 되지 말아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리외는 추상이 행복보다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나는 일이 있으며, 그럴 때는 오직 추상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중략)...이렇게 해서, 그리고 새로운 차원에서 리외는 그 긴 시기에 우리 도시의 삶 전체를 형성했던, 각자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 사이에서 그런 종류의 지긋지긋한 투쟁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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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아무리 좋게 말해도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책이다. 자본주의에 대해 궁금한 사람보단 차라리 근세의 유럽 군대의 발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더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이지 않을까라고 생각되는 책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전 해왔는지에 대한 책은 예전부터 많았다. 그런데 예전 자본주의의 탄생을 분석한 책들은 대부분 생산자 위주로 분석하였지만 베르너 좀바르트의 '전쟁과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탄생과 발전을 전쟁과 그 전쟁에 참여하는 군대라는 거대한 소비집단과 결부시켜 연구한 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한다.

 

2. 책의 내용

 

 책은 총 6장에 걸쳐 전쟁이 자본주의의 태동과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한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근대 군대, 그러니까 상비군 제도가 발달하고 그 규모가 중세시대를 아득히 뛰어 넘게 됨으로써 군대를 무장시키고 먹이고 입히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군대는 생산하는 것은 없지만 단순히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비용이 사용하는 소비자로써 시장에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거대하고 지속적인 수요는 생산자들로 하여금 낮은 비용과 합리적인 품질을 바라는 수요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분업화와 전문화를 촉진시키게 되었다. 또한 자본가들은 이 수요를 바탕으로 자본금을 불려 더욱더 거대한 자본세력으로 성장 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라는 사실을 수 많은 표를 통해서 명하고 있다.

 

 여기는 대항해시대에 빠질 수 없는 조선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 되어 있다.

 

 전쟁이 근대 군대를 만들어 냈으며, 근대 군대는 자본주의 경제의 중요한 조건들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근대 군대가 재산 형성자로서, 성향 형성자로서, 특히 시장 형성자로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발전을 얼마나 촉진시켰는가이다.

 

 전쟁이 증권 거래소를 만들어 냈다. 우선 우리가 여기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유가 증권 거래소이다.

 

 무기의 통일성이라는 사상에 우리 소비재의 통일성 관념이 처음 나타났다.

 

 

3. 마치며

 

 과거나 지금이나 전쟁과 돈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인 것 같고, 지금은 전쟁과 자본주의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한 것은 케인스주의를 기반으로한 뉴딜 정책 때문이 아니라 세계 2차 대전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케인스 주의의 핵심요지가 시장에 부족한 유효수요를 진작하기 위해 정부 지출을 늘리는 것이니 군인이라는 일자리를 마련하고 전쟁이라는 행위를 통해 어마어마 한 소비를 했으니 얼마나 목표에 부합하는 일이 아닌가?

 

 자본주의 초기에는 생산이 미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생산자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연구하는 동안 전쟁과 군대라는 것을 통해 수요자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연구한 좀바르트의 통찰력이 대단한것 같다.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가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되기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가 계속해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생산과 소비, 그리고 파괴의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는 전쟁은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이 할 때마다 계속해서 나타날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로스차일드'가나 '쿠거'가 와 같은 부자가 되고 누군가는 난민이 되거나 최악에는 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전쟁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다. 전쟁은 여기에서는 파괴하고, 저기에서는 건설한다.

 

 제철 공업이 특히 무기 수요에 의해 그리고 조선이 전함 수요에 의해 한층 더 높은 형태로 변형되었다면, 따라서 제철 공업과 조선이 결국 전쟁이 낳은 아이들이라면, 전쟁은 이로 인해 다시 파괴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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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누구나 제목은 한 번쯤 들었을 명저인 '죄와 벌' 드디어 다이제스티 판이 아닌 완역본으로 읽었다. 읽은 날짜는 꽤지났는데 도저히 리뷰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아 못쓰고 있다가 드디어 쓰게 되었다. 축약본 조차 꽤나 긴 이 책을 완역본으로 보려면 800페이지가 넘는 무시무시한 두께의 책이 된다. 그리고 러시아 소설 특유의 등장인물의 이름이 헷깔리는 상황을 끊임 없이 마주하다보면  정신이 혼미헤지는 기분이든다.

 

 지독할 정도로 상세하고 치밀한 묘사를 읽다보면 가끔씩은 내가 살인을 저지른 로지온 마냥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는데 여기에 기여한 것은 당시 러시아의 고료 산정 방식에도 영향이 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의 고료 산정은 글자 수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하니 작품의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톨스토이와 달리 가난한 집안 출신인데다 개인적으로도 도박에 빠져있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상황에서는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축약본의 경우 로지온과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다보니 다른 등장인물들의 특색이 살아나지 않았는데 완역본으로 보니 로지온을 제외한 등장인물들도 굉장히 특색있고 흥미롭다. 대체 이 소설 한편에 이런 인물들을 어떻게 다 엮어 넣을 생각을 했을까라고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2. 줄거리

 

 아마 다들 이 책에 스토리에 대해 한번쯤은 들어보거나 읽어는 보았을 것이다. 어린이용 만화책으로도 많이 나왔으니 말이다.

 

 가난한 대학생인 로지온은 전당포를 운영하는 노파인 일리나를 계획적으로 죽이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일리나의 동생인 리지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게 되고 그의 범행이 들키려는 순간 운 좋게도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후 로지온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게 되고 결국은 포르피리의 압박과 소냐의 설득에 힘 입어 자수를 하게 되고 시베리아 수형소로 향하게 된다.

 

 이야기는 살인사건을 중심에 놓고 풀어나가지만 살인사건 그 자체보다는 그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 정확히는 살인사건을 일으킨 인물의 배경사상과 그 이후의 심리 상황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살인자의 분신과 같은 역활을 하는 인물과 주변인들이 그를 끊임 없이 자극하며 그의 행위와 사상의 괴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그게 읽는 사람이나 로지온을 끈덕지게 붙들고 늘어진다.

 

 

3. 죄

 

 그 유일한 이유인즉 자기가 계획한 일은 '범죄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로지온은 일종의 자아도취 상태이다. 그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일리나를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은 그를 벌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는다. 나폴레옹을 숭배하다시피 하는 로지온의 이런 생각은 그의 논문을 통해 은근슬쩍 드러내고 있다. 위대한 자는 법률을 초월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돈을 훔치고도 쓰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의 어머니가 겨우겨우 마련해서 보내준 돈마저 몇번 보지도 못한 소냐의 아버지의 장례식에 써달라고 다 줘버린다.

 

 로지온은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살인사건을 제외한 그의 행위들을 보자면 그가 진정으로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명예와 정의를 아는 인물 같다. 어려운 친구를 돕고 절망에 빠진 가족을 사려 깊게 돕는다. 그리고 눈앞의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진정한 가족의 행복을 챙긴다.

 

 또한 라주미힌 같은 친구를 가지고 있고 그의 주변 사람들 조차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난 이후 광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참을성 있게 그를 챙기는 것을 보면 (심지어 숙소의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자 조차!) 평소 그의 행실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 남음이다.

 

형씨, 극빈은 죄랍니다. 그냥 가난한 정도라면 아직은 타고난 감정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빈한 상태라면 아무도 절대 그럴 수 없지요.

 

 로지온은 소냐의 아버지의 입을 빌어 또 다시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 자신을 심정적으로 변호해준 소냐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챙겨준 것은 아닐까?

 

4. 죄1

 

 범죄를 저지르기 전 자신이 하는 일을 범죄라고 믿지 않았던 로지온은 대체 왜 자수를 하게 된 것일까?

 

 먼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일리나를 살해한 후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 버린 '리자베타' 일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두려움에 질려 살해 된 리지베타는 그를 끊임 없이 괴롭니다. 그의 범죄에 관한 신념은 시작부터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로지온 대신 살인자로 몰려 법정에 서게 된 노동자가 두번째 이유일 것이다.

 

 리지베타는 그녀의 언니인 일리나와 달리 굉장히 선한 인물이고 살인자로 몰리게 된 페인트 노동공은 대학생이었고 나름 지인식층인 로지온과는 달리 공권력에 쉽게 휘둘리는 약자이다. 분명 큰 사회적 선을 행하기 위해 한 행동에 의도치 않게 약자들이 말려들자 로지온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냐와 포르피리가 이 사실을 자극하고 자신의 이상과는 다른 초라한 모습을 쪼잔한 루쥔과 잔혹한 스비드리가일로프를 통해 만난다.

 

루쥔과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로지온이 가지고 있는 이상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루쥔은 가난한 두냐(로지온의 여동생)을 도우며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려 하지만 오히려 로지온의 반대 등으로 인해 모욕받자 당사자도 아닌 가장 약한자인 소냐를 자신의 음모에 끌어들여 쪼잔한 복수를 하려고 한다.

 

 사랑 때문에 두냐를 쫓아 페테부르크로 온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무 죄 없는 아니 오히려 자신을 구원해주었던 전 부인을 살해하는 일을 저지르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통해 소냐를 도와준다.

 

 

5. 죄2

 

 로지온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죄인지 아닌지 끊임 없이 고민하다 결국은 자수를 하며 이 책은 일단 끝이 난다. 그리고 에필로그 형식으로 이야기가 더 이어진다. 로지온은 재판을 받는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벌어졌던 혹은 행했던 일에 대한 모든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들이 감형의 이유가 된다.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 시베리아 유형지로 보내진 그를 괴롭히는 것은 고된 노동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빈약한 식사도 아닌 자신의 죄를 인정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병이 났던 것이다. 오, 만약 스스로 죄를 인정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중략) 자신을 아무리 엄중하게 심판하고 양심을 모질게 다져 봐도 지난 일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실책 외에는 유달리 끔찍한 죄를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다. (중략) 저 무슨 선고의 '어처구니없음'과 타협하고 그것에 굴복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대체 그는 왜 자수를 했던 것일까? 정말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말처럼 공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죄가 스스로를 죽이지 않기 위해 사회적 처분이 필요했던 것 일까?

 

 책은 애매하게 결론을 맺는다. 로지온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한 모습을 보이며 갱생을 하는 것 같이 해놓긴 해놨는데 정말?? 이라는 물음표를 남긴다.

 

6. 마치며

 

 죄와 벌이라는 것은 참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영역인것 같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률로서 엄정히 벌을 집행했다고 할지라도 그 범죄에 대한 죄과를 다 치뤘다고 할 수 있을지 또는 피해자가 용서를 해야만 할지 관해서는 늘 의문이 든다.

 

 범죄를 저지르고 정신착란에 빠져 자살이라도 할 것 같던 로지온은 공적인 영역에서 벌이 부과되자 억울한 생각이 든다. 사실 요즘 이런 상황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일본은 위안부 합의로 인해 모든 일이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참 고민되는 일이다. 공공의 법 집행이 범죄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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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베르테르 효과라는 용어가 탄생하고 롯데 그룹의 이름의 모태가 된 여인 로테가 등장하는 소설을 괴테는 고작 25살이라는 나이에 고작 14주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필독 도서라는 이유로 한번 읽었던 적이 있는데 사실 당시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그로 부터 10년도 넘은 후 읽어보니 글을 어마어마하게 잘 쓰여졌다는 생각과 함께 책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10년 동안 나도 그저 놀지만 않았는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생각을 하고 느껴보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도 체험한 것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괴테가 "친화력" 이라는 작품에서 쓴 글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자신과 자신의 친구의 이야기를 조합하여 쓴 글이다. 그래서 더욱 더 공감이 가는 것일까?

 

2. 책의 내용

 

 고향을 떠나 젊고 여유와 학식을 갖춘 그러나 계급 가치와 같은 기존의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 베르테르, 이 젊은이가 보자마자 반하여 영혼을 다 바쳐 열열히 사랑하는 여인 로테. 그런데 이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인 로테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

 

 베르테르는 긍정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꽤나 종교적으로도 독실 한 듯하다.

 

 "우리 인간들은 곧잘 불만을 늘어놓기 일쑤죠. 살아가면서 좋은 날은 적고 나쁜 날만 많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매일 내려 주시는 가득한 은혜를 우리가 마음을 열고 누리고자 한다면,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걸 충분히 이겨 낼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 베르테르

 

 "우울함이란 게으름과 무척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것은 게으름의 일종이죠." - 베르테르

 

 그리고 개인의 감정과 마음 먹기에 따라 인생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젊은 이었다. 이런 그가 약혼자가 잠시 여행을 간 틈에 로테에게 사랑을 느끼고 매일 그녀를 지켜보며 행복에 겨워하는데. 불행히도 그녀의 약혼자인 알베르트가 돌아와 그녀의 곁을 차지 함으로써 그의 행복은 막을 내리게 된다.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가 돌아 왔을 때 베르테르는 이미 이성의 힘 보다는 감성의 힘을 훨씬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모해 있다.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이성적인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는 로테 곁을 맴도는 베르테르를 억지로 모욕을 줘 일부러 밀어 내려하지는 않지만 둘 사이에는 의견 충돌이 잦아 진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라고요. 조금 더 분별력이 잇다 한들 격정에 휩싸여 한계로 치닫게 되면 약간의 이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 베르테르

 

 결국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그녀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로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틀림없이 다시 만날 겁니다!" - 베르테르

 

 사랑이라는 감성의 지배를 받던 베르테르는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나가 일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베르테르는 인부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 받고 사회에 잘 적응 하는 듯 하지만 하지만 결국 인습을 거부하는 그의 태도는 벽에 부딪혀 사회에서도 도태 당해버리고 만다. 실의에 찬 그는 결국 공직 사회에서도 밀려버리고 다시 로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얼마 전부터 나는 무척 예의를 차리게 되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더군요. - 베르테르

 

 그는 예전에 그곳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다.

 

 까닭은 잘 모르겠지만 전과 같은 분위기가 나지 않아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지 않네 - 베르테르

 그냥 내가 영주라면! 내가 정말 영주라면, 내 관할 안에 있는 나무들 정도야! - 베르테르

 

 로테 때문에 번민하고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두 남자를 만나게 된다. 일전에 보았던 과부 주인을 사랑하는 하인 남자, 그는 결국 과부에게 사랑 고백을 했지만 거절 당하고 쫓겨났고 종래에는 새로운 하인을 죽이는 일을 저지른다. 그리고 또다른 한남자는 로테를 사랑했지만 실패하여 미쳐버린 한 남자이다. 이 둘은 베르테르가 선택할 수 있는 두가지 선택의 결과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전에 말했던 감정에 극한에 몰려버린 그저 인간의 모습을 말이다.

 

 베르테르는 고민한다. 그리고 로테 역시 자신의 감정으로 인해 혼란을 느낀다. 오직 알베르트 만이 여전히 이성적인 듯 하다. 결국 베르테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로테에게 편지를 남기고는 그녀가 하인에게 건내 준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다. 사랑받은 그녀에게나 사랑한 그에게나 비극이다.

 

3. 마치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계몽주의의 합리적인 감정 절제에 반발하여 극단적인 감정을 자유로이 표출한, 독일 문학의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 운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고 한다.

 

 이상하게 어느 시대에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제한 받았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로마시대에는 병사들의 결혼을 막기도 했고 중세 교회야 말 할 것도 없고 (아.. 기사도에 의한 사랑은 예외인가?), 위에서 말하는 계몽주의 시대나 심지어 요즘 역시도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삼포세대' 라는게 나타나니 말이다.

 

 사랑을 만나고 점점 변해가는 베르테르의 모습을 '서간(편지)' 형식으로 섬세하게 그려내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우울과 같은 개인의 감정을 조절 할 수 있다고 믿던 베르테르가 로테를 만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감정에 대한 생각이 변해가고 결국은 어찌보면 변하기전 베르테르와 비슷하다고 할 수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알베르트와 대립하고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감정에 혼란스러워 하며 괴로워하는 로테, 안타깝게도 이 여인의 아픔을 헤아려주기엔 이 두 남자가 각자 자기 일로 너무 나 바쁘다. 그녀야 말로 어머니로 부터 물려 받은 임무와 사회적 인습에 짖눌려 있는 제대로 감정조차 표출하지 못하는 이 책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로테가 아닐까?

 

 알베르트는 로테의 생명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함께 가지 못했습니다. 인부들이 시신을 운구를 메고 갔으며, 성직자는 한 사람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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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러시아의 대문호인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났던 한 문장이 있다. "아름다운 청년의 죽음은 비극적인 이야기의 소재가 되지만 한 평범한 노인의 죽음은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한다." 이 말을 누가 했는지 이 문장이 정확한지는 모르겟지만 책을 읽고 느낀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이렇다.

 특별하고 믿었던 평범한 제정 러시아의 고위공직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2. 책 내용

 이반 일리치는 매우 평범한 것 같다. 마치 우리가 자소서에 흔히 적듯이 엄격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 책임감이 강하고... 라고 시작 할 것만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가문에서 둘째로 태어나 가족의 기대를 받으면서 성장한 이반 일치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 성장한다. 가끔 일탈을 즐기지만 어디까지나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만의 일탈이다. 주위에 둘러 보면 분명 한 두명씩은 있을 법한 사람이다.(좋은 가문을 뺀다면...) 그런데 그는 자신을 특별하다가 믿는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카이사르는 죽는다" 라는 평범하지만 강력한 명제를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니라는 이유로 부정해버리는데..

 아무튼 그는 평범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구자나 개척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윗사람들의 의도와 목적 사회적 관습에 충실하게 생활을 하며 결혼마저 그런 의도에서 해버린다. 으레 그렇드스 이런 인물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분란을 피하고 적당히 균형잡힌 남들이 보기에 우아한 생활을 즐기며 살아간다.

 결혼 후 그의 그런 생활이 부인의 충동적인 모습과 변덕 때문에 깨어진다는 생각이 들자 가정이 아닌 그의 일인 법률로 피신을 해버리고 그 덕분에 오히려 더 성공가도를 달리기도 한다. 잠시 좌천되는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돈을 위해 새로운 직장을 찾던 그는 그의 인맥 덕분에 우연히 좋은 일자리를 찾고 그가 꿈꾸던 우아한 집을 가지고 가정에는 평화가 찾아오고 그의 삶도 행복이 가득해보인다. 그런데 이런 행복을 주던 집 꾸미기 도중 작은 부상을 입는다.

 이 조그마한 부상은 그의 일상을 깨버린다. 부상이 악화되어 그에게 시한부를 선고를 내리는데. 이때부터 그가 믿었던 모든 것들이 깨어진다. 그의 가족관계 혹은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나 법률가로써의 평판 등이 모두 허구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직 평화로운 죽음을 바라는데.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하인 '게라심'을 제외하고는 그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내면서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결국 그는 죽어버린다.

3. 마무리

 죽음이 확정되고 죽음을 기다리는 이반 일리치에게 아무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의사들은 그들의 전문성을 뽐내며 치료를 자신하고 나을 꺼라고 희망의 말을 건내지만 이반 일치지가 하는 말은 듣지를 않고 그의 가족들 역시 죽어가고 있는 이반 일리치를 바라보며 동정하고 슬퍼하기 보다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거나 그가 죽음으로써 가져올 경제적 변화에 대해서 더 신경쓰며 본능적으로 타인의 죽음 혹은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죽음의 공포라는 것을 회피하려는 듯 보인다. 그의 직장 동료들은 그의 죽음을 겉으로 안타까워 하는 척하지만 각자의 일과 그의 죽음이 가져올 공석과 이로 인한 인사이동과 승진의 기회를 계산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그의 장례식 조차 타인들에게는 귀찮은 일일 뿐이다.

 오직 게라심 만이 이반 일리치를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동정하고 돌봐주고 이반 일리치 역시 그런 그의 진심이 느껴져서 그에게 의지한다. 어떻게 보면 그의 지위나 상황이야 말로 이반 일리치가 죽던 말던 변함이 없음으로 그의 죽음을 죽음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평범한 현실 속에서 그것을 잘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하면 열심히 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내일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타자의 죽음을 통해 그것이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역시 그것을 직시 하지 못하고 회피하려하거나 외면하려 한다.

 결국은 그 죽음이라는 것이 나를 찾아 와야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 볼 수 있다. 이반 일치리는 이 경험을 통해 타인의 시선 혹은 의도에 이끌려 살아온 삶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무의미 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만 이러한 교훈을 전해준 죽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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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명견만리' 만리 밖의 일을 환하게 사려 알고 있다. 라는 뜻의 책의 제목처럼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주목해야만 할 주제들을 잘 다루고 있는 책인 것 같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소위 '뉴노멀' 시대가 되고 A.I, 로봇, IoT 등의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브렉시트, 난민 문제등으로 인해 세계저으로 고립주의가 떠오르고 있다. 세계의 패러다임이 또 다시 한번 급격히 변화를 맞이고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한때 IT강국으로 알려졌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라고 하던 우리의 경제는 또 어떤가?

 과연 우리에게 또 다시 한번의 기회가 올까? 얼마전 매직아워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이제 노년이 되어 노인 광고 모델로 일하고 있는 영화배우가 중년의 무명의 영화 배우로 활동하던 '무라타'가 영화를 포기 하려고 한다고 했을 때 건냈던 이야기이다.

 "촬영을 하다 매직아워가 지나가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나? 내일까지 기다리면되. 내일이 온다면 반드시 매직아워가 다시 나타나게 되어있지. 나는 아직도 다시 올 매직아워를 기다린다네."

2. 책의 내용
 동명의 TV프로그램은 좀 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지금 출간 된 책은 크게 3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인구, 북한, 의료에 관한 문제이다.

 먼저 인구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들 이미 인식하고 있겠지만 고령화와 인구감소, 청년실업 문제는 이미 사회적으로 심각한 단계에 접어 들었다. 그리고 정부도 이를 인지하고 여러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다지 약발이 잘 먹혀 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결과로 경제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제파트는 로봇과 변화하는 자본주의 정치를 다루고 있고 우리나라의 기회로써 북한을 다루고 있다.

 의료분야를 읽다보면 굉장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있는데. 이미 세계적으로 보편화가 되어가고 있는 유전자 분야와 치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실 치매가 이렇게까지 흔한 질병 일줄은 미처 짐작도 하지 못해서 큰 충격이었다.

3. 마무리
 혼란스러운 시대이다. 많은 국가들이 그간의 질주하던 자본주의와 경제 발전이라는 기차에서 하나둘씩 내리는 입장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미처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지도 못한 채 질주하는 기관차에서 내려야 하는 처지에 있다. 과연 우리는 이순간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정말 만리를 내다 볼수 있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점인 것 같다.

 P.S  번외로 유전자에 관한 내용을 읽다보니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 책은 진화론적인 관점을 한 개체나 종의 집단이 아닌 유전다 단위로 보았는데 유전자의 가장 큰 목적은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후대에 남겨 퍼트리는 것이고 인간은 이 역활을 수행하는 일종의 숙주 혹은 기계적 역활을 수행한다고 정의했다. 그럼 이제 인간이 직접 유전자를 선별하여 조작하게 되면 이 관계가 어떻게 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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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요 근래에 읽은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하나 말해보라고 하면 나는 이 책을 뽑을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시점에 가장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기는 하다.) 책이 재미있거나 수 많은 정보를 담고있는 그런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 었다고 말하고 싶다. 책은 노화와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라는 '웰다잉'을 다루고 있기 보다는 죽음에 이르기 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웰리빙'을 담고 있는 책인 것 같다.

 

 사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노화와 죽음이라는 것을 일상 생활에서 마주 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그런 것과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병원이나 요양원 등 사회와 '격리' 된 공간에 존재하여 분명 존재하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일상 생활에서 마주치지란 쉽지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30대 초반이라는 나이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조부모님과 함께 살지도 않았고 다들 굉장히 어린시절 돌아가신 터라 두 가지를 가까이서 대 해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또한 말 그대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걱정과 고민만 가득한 덕분에 늙어감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생각해 볼 여유도 없고 피하고 싶기도 한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매우 충격적이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늙어 가고 있다. 비록 갑작스럽게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내일도 오늘처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고 나 혼자 씻을 수도 옷을 입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늙는다. 그리고 언제 죽을 것이다. 이건 모두가 알지만 피하고 싶은 진실 일 것이다.

 

 책은 먼저 나이 듦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다양한 사례들을 들어 노화에 따른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읽는 동안 굉장히 끔찍하고 괴로운 일었다. 내가 저 상황이 된다면? 개인이 가지고 있던 세계가 부서지고 더 이상 내가 살아가던 생활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된다면? 그저 내가 짐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면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2. 나이 듦에 대해

 

할머니는 서서히 병약해져 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갈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진정으로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우리에게 나이가 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나이가 꽤 들어도 건강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해서 허약해 질 것이고 질병에도 더 자주 걸릴 것이다. 그리고 관절염 따위가 찾아와서 더 이상 혼자서 걸을 수도 없을 지도 모르고 이렇게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 될 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럭저럭 혼자서 혹은 배우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맙소사 어느날 치매까지 와 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쓰러져서는 다리 뼈마저 부서졌다!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 스스로 혹은 자녀들의 권유로 나와 같은 노인들이 가득한 요양원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정말 최선의 선택일까? 

 

 사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인들이란 환영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 예전에는 노인들은 그야 말로 살아 있는 정보의 보고였다. 그들이 살면서 축적해온 경험과 지혜 등은 그 아들 대에도 유효한 것이다. 과거에는 모내기를 하는 시기나 방법을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물어 보고 마을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고장에서 오래 살아 강력한 커뮤니티 파워를 가진 이들을 찾아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 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노인의 지혜를 찾기 보다는 구글을, 페이스북을 트위터를 찾는 것이 훨씬 빠르고 신뢰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 할 것이다. 이로인해 현대 사회의 노인은 그야 말로 생산성은 떨어고 건강 유지나 치료에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비 효율적인 존재로 취급되기 쉽상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런 이들을 요양원이란 이름의 수용소로 그들을 격리 시켜 버린 것은 아닐까?

 

 요 근래 우리나라에도 많은 요양원들이 생겨났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한다. 물론 나는 그 곳에 단 한번도 방문해 본적이 없어 그것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일반적인 요양원은 노인들을 고장이나 폐기직전의 고철기계 취급을 하는 것이다. 당장 부서뜨리거나 버릴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나사를 조이고 기름칠을 해서 유지만 하려는 듯 보인다. 그들은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관리를 해야할 대상으로 대한 다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 당연히 사람들이(노인이 아니다!) 만족 할 리가 없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의 일상생활을 획일적으로 관리하려고 하디니 말도 안되는 일이다.(회사도 아니고 그리고 회사는 퇴근이라도 하지.) 이로인한 반발과 대안으로 미국에는 다양한 대안 단체나 기구 등이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3. 죽음에 대해

 

우리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대신 오늘을 최선의 상태로 살기로 한 결정의 열매를 눈으로 확인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2년마다 제공하는 종합검진을 받고 왔다. 나는 의례적으로 하는 검진을 아무런 생각 없이 넘기고 있었다. 나는 매우 건강했고 술은 적당히 담배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규칙적이고 균형잡힌 식사와 더불어 운동도 꾸준히 했기 때문에 건강에 대해서 매우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 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터라 그런 곳에는 신경 쓸 여유가 더더욱 없었다! 이번 일만 잘되면 초고속 승진은 문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 며칠 밤을 새고 무리한 덕분인지 계속 미열과 더불어 기침을 계속했다. 나는 감기 몸살인가 싶어 한여름임에도 긴팔을 입고 있었다. 부장님은 나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격려를 하며 쉬라고 권했지만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계속 일을 했고, 집으로 검사 결과표가 도착했다. 그러나 회식으로 피곤했던 나는 대충 뜯어보곤 책상위에 던져 둔 채 잠을 청했다.

 

 다음 날, 회사에서 일하는 나에게 전화가 왔다. 담당 간호사는 심각한 목소리로 나에게 폐 검사에서 이상한게 발견 되었으니 재검을 받으러 오라고 했다. 그리곤 단순한 착오 일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말라고 했다. 걱정이 된나는 최대한 재검일정을 빨리 잡고는 병원으로 향했고 의사는 재검 결과 폐암 말기로 진단을 내렸다. 

 

 의사는 내게 최대한 긍정적인 태도로 말하는 것 같았다. 수술은 불가했다. 그들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온갖 약물들을 주입하고 치료 방법들을 사용했다. 날 이 갈수록 정신은 몽롱해져가고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져만 간다. 그런데 병은 계속해서 악화만 되어간다. 그렇지만 담당 의사는 계속 헛된 희망을 나에게 주는 것 같다. 어느 날은 아예 정신을 잃었다. 일어나 보니 나는 중환자실에 있었고 그들은 나에게 심폐소생술을 시쟁했다고 했다. 그리고 몸에는 또 못보던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위에 글은 그냥 책을 읽었던 기억으로 그냥 내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물론 의료적으로 틀린 것도 굉장히 많을 테지만 그냥 하나의 예일 뿐이니 넘어가자.

 

 요즘은 정말 환자들이 죽고 싶어도 죽기가 쉽지 않은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모 회장은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여러해 동안 살아계시니 말이다. 사실 정말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행해지는 이런저런 치료들이 필요한 일 일까? 물론 환자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충분히 필요 한 일이다. 그러나 결과를 바꿀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까운 그저 조금의 시간을 벌기 위해 행해지는 치료들로 인해 환자가 오히려 피폐해져 소중한 남은 시간마저 잘 활용 할 수 없게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하기전에 어느 순간부터는 환자의 의사는 대부분 물어보지 않는다. 아니 금기시 되어 환자와 미리 그런것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환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의료진도 환자의 보호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니 그거 죄책감 혹은 의무감 등으로 오히려 환자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고통 속에 빠트리고 있지는 않을까?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인체 숨을 거두고 싶은 환자를 억지로 중환자실에 밀어 넣은체 차가운 병동에서 홀로 죽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단편적으로 정리 해놓은 것들을 보면 저자가 '존엄사'를 찬성하는 것 처럼 보일이 것이다. 그런데 사실 책에서 저자는 존엄사를 비판하는 입장이다. 어떻게 죽을 지만 고민하고 죽기까지 어떻게 사는 지에 대한 고민과 대책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호스피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4.마무리

 

 서두에도 썻다시피 굉장히 좋은 책이었다. 책을 읽고 난 이후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미뤄두고 싶었던 고민을 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곤 나 개인의 노화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호스피스나 어시스턴트 리빙 등의 대안들이 굉장히 마음에 끌리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들 인 것 같다.

 

 시간을 고민해 보았지만 아직 아무런 그럴 듯한 결론도 내지 못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하고 우선인지는 그때 가봐야지만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또 누구나 미리 고민을 해보아야 할 문제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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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1984'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책 제목도 알고 내용도 대충은 알지만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 누구나 알지만 완독을 한 사람은 많이 없는 '고전명작'의 정의에 잘 부합하는 조지 오웰의 또 다른 명저이다.

 

 동물농장은 초기 출간 당시 동물들이 등장하는 우화라는 이유 등으로 어린이 서적으로 분류되기도 했고 후에는 많은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에서 대표적인 반공 서적으로 활용 되기도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작가를 잘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물 농장을 공산주의를 풍자하며 비한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텐데요. 물론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저자인 조지 오웰은 유명한 사회주의자 이자 무정부주의 자였습니다. 영국 독립 노동당 당원이기도 했던 그는 위험한 좌파 인사로 낙인 찍혀 영국 정부의 감시를 받기도 했죠. 1984도 마찬가지겠지만 비록 동물농장이 당시의 소비에트연방의 인물들을 대입시켜 우화시켜 이야기를 써내기는 했으나, 그는 단순히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가르고 공산진영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의와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주의를 비판 했다고 보는게 옳을 것입니다.

 

2. 줄거리

 

 '메이너 농장'의 주인인 존슨에 의해서 사육당하고 있던 동물들은 평소 존경받던 늙은 수퇘지 메이저(마르크스)의 꿈 이야기를 듣고 농장에서 인간을 내 쫓는 혁명을 꿈꾸게된다. 그리고 메이저는 몇일 후 숨을 거두게 되고혁명은 생각과는 다르게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문득 별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일어나게 된다.

 

 혁명 후 동물들은 행복하다. 농장의 유이한 번식용 수퇘지인 스노볼(트로츠키)와 나폴레옹(스탈린)의 주도로 나름의 규율도 만들어지게 되고 체제를 정비한다. 동물들은 스스로가 농장을 소유 하게 됨으로써 더 적게 일하면서도 더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누구에게 예속 된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가 자유를 쟁취하고 체제를 설립하게 되었다는데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동물들은 실제로 혁명의 목표였던 모든 동물들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 처럼 보였다.

 

 돼지들의 주도로 교육도 이루어지며 동물들은 날이 갈 수록 행복해진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행복의 이면에는 돼지들의 탐욕이 조금씩 숨어있다. 존슨이 자신의 농장을 되찾기 위해 침입하지만 스노볼과 복서의 활약으로 물리친다. 그 후 농장의 주도권을 다투던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농장에 풍차를 건립하는 일로 대립한다. 그리고 결국 나폴레옹은 교육을 명목으로 육성하던 개들(비밀경찰)을 이용하여 스노볼을 축출한다.

 

 이 문제에 대해 몇몇 동물들이 문제를 제기하나 개들과 이미 매수된 양들(언론), 스퀼러(몰로토프)를 이용하여 불만을 잠재운다. 나폴레옹은 쏟아져나오는 문제와 불만들에 대해 스노볼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문제가 벌어지는 온갖 문제를 스노볼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존슨이 돌아온다고 위협하기도 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동물들의 삶은 점점 힘들어져 간다. 그에 비해 돼지와 개의 삶은 오히려 점점 풍족해지는 것 같다. 풍차는 2번씩이나 무너졌고 존슨의 침입은 한번 더 있었다. 많은 동물들이 죽고 다쳤다. 조금 똑똑한 동물들은 나폴레옹이 혁명 초에 세웠던 규율을 위반한다는 의심을 가지지만 어쩐 일인지 규율에 어떤 단서들이 달려 나폴레옹의 행동을 정당화 하고 있었다.

 

 결국 나폴레옹 동무의 말은 옳다와 내가 더 고생하면 되지 라는 신조를 가지고 일을 하며 다른 동물들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던 복서는 결국 병이 나서 쓰러진다. 그리고 치료를 위해 동물병원으로 간다는 이야기와는 다르게 도축업자에게 팔려간다. 많은 동물들의 분노를 일으켰던 이 일역시 스퀼러의 노련한 언변술로 금새 잊혀지고 만다.

 

 결국 돼지들은 일부 인간이 아닌 다른 농장의 주인들까지 농장으로 불러들여 파티를 벌인다. 그리고 그 파티 속에서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3. 감상평 및 맺으며

 

 책은 서두에도 썻다 시피 소비에트연방의 인물들을 대입시켜 우화로 만들어 독재정권을 비판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어디서 많이 본 모습 같다.

 높은 고위 공무원 양반이 이 책에서 가장 고위 권력층인 "개, 돼지" 라고 시민들을 비유했던 어느 나라와 무척이 닮아 있는 농장이다.

 장미 및 비전과 공약들을 제시 했지만 권력을 잡자 그런 것들은 모조리 폐기 시키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꿔버렸다. 그리고 언론들은 헛소리만 하며 정부가 불러준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많은 문제들은 북쪽의 깡패 국가 탓으로 돌린다.

 사드와 같이 매우 중대한 시설을 설치하는 일은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설치지역에 공청회나 설득 작업을 전혀 진행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의지로 진행시켜 버린다. 그리고 북쪽 깡패들의 위협을 받고 싶지 않으면 시민들에게 다른 대안을 내놓으라고 겁박한다.  

 결국은 우리는 이 속에서 복서처럼 미친 듯이 노력을 하며 살아 봤자 도살장으로 끌려갈 운명이란 말인가?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다음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빌며, 1945년 거의 나온지 70년 씩이나 된 책에서 오늘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이 책이 과연 명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낄 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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