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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누구나 제목은 한 번쯤 들었을 명저인 '죄와 벌' 드디어 다이제스티 판이 아닌 완역본으로 읽었다. 읽은 날짜는 꽤지났는데 도저히 리뷰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아 못쓰고 있다가 드디어 쓰게 되었다. 축약본 조차 꽤나 긴 이 책을 완역본으로 보려면 800페이지가 넘는 무시무시한 두께의 책이 된다. 그리고 러시아 소설 특유의 등장인물의 이름이 헷깔리는 상황을 끊임 없이 마주하다보면  정신이 혼미헤지는 기분이든다.

 

 지독할 정도로 상세하고 치밀한 묘사를 읽다보면 가끔씩은 내가 살인을 저지른 로지온 마냥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는데 여기에 기여한 것은 당시 러시아의 고료 산정 방식에도 영향이 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의 고료 산정은 글자 수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하니 작품의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톨스토이와 달리 가난한 집안 출신인데다 개인적으로도 도박에 빠져있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상황에서는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축약본의 경우 로지온과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다보니 다른 등장인물들의 특색이 살아나지 않았는데 완역본으로 보니 로지온을 제외한 등장인물들도 굉장히 특색있고 흥미롭다. 대체 이 소설 한편에 이런 인물들을 어떻게 다 엮어 넣을 생각을 했을까라고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2. 줄거리

 

 아마 다들 이 책에 스토리에 대해 한번쯤은 들어보거나 읽어는 보았을 것이다. 어린이용 만화책으로도 많이 나왔으니 말이다.

 

 가난한 대학생인 로지온은 전당포를 운영하는 노파인 일리나를 계획적으로 죽이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일리나의 동생인 리지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게 되고 그의 범행이 들키려는 순간 운 좋게도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후 로지온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게 되고 결국은 포르피리의 압박과 소냐의 설득에 힘 입어 자수를 하게 되고 시베리아 수형소로 향하게 된다.

 

 이야기는 살인사건을 중심에 놓고 풀어나가지만 살인사건 그 자체보다는 그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 정확히는 살인사건을 일으킨 인물의 배경사상과 그 이후의 심리 상황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살인자의 분신과 같은 역활을 하는 인물과 주변인들이 그를 끊임 없이 자극하며 그의 행위와 사상의 괴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그게 읽는 사람이나 로지온을 끈덕지게 붙들고 늘어진다.

 

 

3. 죄

 

 그 유일한 이유인즉 자기가 계획한 일은 '범죄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로지온은 일종의 자아도취 상태이다. 그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일리나를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은 그를 벌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는다. 나폴레옹을 숭배하다시피 하는 로지온의 이런 생각은 그의 논문을 통해 은근슬쩍 드러내고 있다. 위대한 자는 법률을 초월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돈을 훔치고도 쓰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의 어머니가 겨우겨우 마련해서 보내준 돈마저 몇번 보지도 못한 소냐의 아버지의 장례식에 써달라고 다 줘버린다.

 

 로지온은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살인사건을 제외한 그의 행위들을 보자면 그가 진정으로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명예와 정의를 아는 인물 같다. 어려운 친구를 돕고 절망에 빠진 가족을 사려 깊게 돕는다. 그리고 눈앞의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진정한 가족의 행복을 챙긴다.

 

 또한 라주미힌 같은 친구를 가지고 있고 그의 주변 사람들 조차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난 이후 광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참을성 있게 그를 챙기는 것을 보면 (심지어 숙소의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자 조차!) 평소 그의 행실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 남음이다.

 

형씨, 극빈은 죄랍니다. 그냥 가난한 정도라면 아직은 타고난 감정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빈한 상태라면 아무도 절대 그럴 수 없지요.

 

 로지온은 소냐의 아버지의 입을 빌어 또 다시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 자신을 심정적으로 변호해준 소냐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챙겨준 것은 아닐까?

 

4. 죄1

 

 범죄를 저지르기 전 자신이 하는 일을 범죄라고 믿지 않았던 로지온은 대체 왜 자수를 하게 된 것일까?

 

 먼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일리나를 살해한 후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 버린 '리자베타' 일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두려움에 질려 살해 된 리지베타는 그를 끊임 없이 괴롭니다. 그의 범죄에 관한 신념은 시작부터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로지온 대신 살인자로 몰려 법정에 서게 된 노동자가 두번째 이유일 것이다.

 

 리지베타는 그녀의 언니인 일리나와 달리 굉장히 선한 인물이고 살인자로 몰리게 된 페인트 노동공은 대학생이었고 나름 지인식층인 로지온과는 달리 공권력에 쉽게 휘둘리는 약자이다. 분명 큰 사회적 선을 행하기 위해 한 행동에 의도치 않게 약자들이 말려들자 로지온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냐와 포르피리가 이 사실을 자극하고 자신의 이상과는 다른 초라한 모습을 쪼잔한 루쥔과 잔혹한 스비드리가일로프를 통해 만난다.

 

루쥔과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로지온이 가지고 있는 이상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루쥔은 가난한 두냐(로지온의 여동생)을 도우며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려 하지만 오히려 로지온의 반대 등으로 인해 모욕받자 당사자도 아닌 가장 약한자인 소냐를 자신의 음모에 끌어들여 쪼잔한 복수를 하려고 한다.

 

 사랑 때문에 두냐를 쫓아 페테부르크로 온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무 죄 없는 아니 오히려 자신을 구원해주었던 전 부인을 살해하는 일을 저지르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통해 소냐를 도와준다.

 

 

5. 죄2

 

 로지온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죄인지 아닌지 끊임 없이 고민하다 결국은 자수를 하며 이 책은 일단 끝이 난다. 그리고 에필로그 형식으로 이야기가 더 이어진다. 로지온은 재판을 받는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벌어졌던 혹은 행했던 일에 대한 모든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들이 감형의 이유가 된다.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 시베리아 유형지로 보내진 그를 괴롭히는 것은 고된 노동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빈약한 식사도 아닌 자신의 죄를 인정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병이 났던 것이다. 오, 만약 스스로 죄를 인정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중략) 자신을 아무리 엄중하게 심판하고 양심을 모질게 다져 봐도 지난 일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실책 외에는 유달리 끔찍한 죄를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다. (중략) 저 무슨 선고의 '어처구니없음'과 타협하고 그것에 굴복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대체 그는 왜 자수를 했던 것일까? 정말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말처럼 공기를 바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죄가 스스로를 죽이지 않기 위해 사회적 처분이 필요했던 것 일까?

 

 책은 애매하게 결론을 맺는다. 로지온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한 모습을 보이며 갱생을 하는 것 같이 해놓긴 해놨는데 정말?? 이라는 물음표를 남긴다.

 

6. 마치며

 

 죄와 벌이라는 것은 참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영역인것 같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률로서 엄정히 벌을 집행했다고 할지라도 그 범죄에 대한 죄과를 다 치뤘다고 할 수 있을지 또는 피해자가 용서를 해야만 할지 관해서는 늘 의문이 든다.

 

 범죄를 저지르고 정신착란에 빠져 자살이라도 할 것 같던 로지온은 공적인 영역에서 벌이 부과되자 억울한 생각이 든다. 사실 요즘 이런 상황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일본은 위안부 합의로 인해 모든 일이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참 고민되는 일이다. 공공의 법 집행이 범죄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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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얼마 전 있었던 노벨상 수상식에 선약이 있다며 참석하지 않았던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인 밥 딜런을 보며 예전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던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가 떠올랐다.

 

 그는 왜 노벨상이라는 어마어마한 명예를 거절 했을까? 사르트르는 간단히 '제도화된 작가가 되기를 거부한다' 라는 짧지만 쿨한 답변을 남겼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무수한 이유들을 들이 밀었다. 그중 하나가 그가 '실존주의' 철학자 였기 때문이다라는 것인데. 대체 그 실존주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구토' 라는 짧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설 형식을 지니고 있는 이 책을 통해서나마 일부 느낄 수 있었다.

 

2. 책의 내용

 

 주인공인 '앙트완 로카텡' 은 연금을 받으며 무직으로 혹은 역사가나 여행가라는 이름으로 부빌 도서관에서 시간을 주로 보내며 '롤르봉' 씨에 관한 책을 쓰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30살의 젊은 남자이다. 이 남자는 때로 여관 주인과 몸을 섞기도 하지만 별달리 욕망이나 야심 따위를 보이지 않으며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그는 과거에 사랑했던 '안니'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와는 헤어진 상태이다. (뭔가 익숙한 느낌의 주인공이다. 마치 하루키 소설속에 흔히 등장 할 법한 남자 주인공이랄까?)

 

 그는 갑자기 어느 날 부터인가 구역질을 하곤 했는데.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하루의 일 들을 기록하며 소설이 시작된다.

 

 그는 부빌에서 생활 하며 그 곳에서 살아가는 부르주아들의 생활을 비웃으며 기존 질서와 관습을 벗어나기 위한 자유를 갈망한다. 그는 바닷가의 조약돌, 심지어 문 손잡이에서 까지 구토감을 느끼며 그것을 상세히 기술하며 자신의 구토감의 원인을 찾아 나선다. 그러던 중 오래전 헤어졌던 연인인 유일하게 진정으로 사랑 했을지도 모를 안니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옛 연인과의 재회를 앞두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다 마로니에 나무 뿌리를 바라보다 직감적으로 자신의 구토감의 원인을 찾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어떤 사물의 실존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가 부여한 뿌리라는 본질이 아닌 진정으로 고유한 실존으로써 존재하는 뿌리를 느끼고는 그것과 자신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이 동떨어진 체 존재했다고 느끼며 당혹감을 드러낸다.

 

 옛 연인과의 재회는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안니는 이미 타성에 젖아 예전에 아름다운 모습과 신비로운 모습을 잃어버렸고 부빌로 다시 돌아온 주인공은 부빌을 떠나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부빌을 떠돌며 자신과 관계 되었던 사람들 한명 한명과 만나 작별 인사를 건낸다. 그리고 역사 연구도 포기하고 절망찬 채 떠나려 할때 재즈음악이 주는 감동 속에서 소설이 구원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책은 끝이 난다.

 

3. 마무리

 

 사실 리뷰를 쓰고 있는 와중에도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를 하고 쓰고 있는지 의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사르트르가 주장했던 실존주의를 간단히 표현하자면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사물들처럼 본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으로써 존재한다.' 라고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 이전의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존재의 목적 혹은 본질을 신에게서 찾았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책에서 그저 세상에 내던저진 것으로 표현하며 인간이 실존한다고 말한다..

 

나는 차라리...... 나에게 주어진, '까닭 없이' 주어진 이 인생 앞에 놀랄 뿐이다.

 

 그리고 그가 했던 또 다른 유명한 말인 '타인은 지옥이다.(HELL IS OTHER PEOPLE)' 라는 말이 책을 읽다보면 점점 이해가 된다.

 

 나는 책임감에 짓눌렸다. 눈을 부릅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안니가 그 순간에 만들어낸 의식의 한복판에서 몸부림칠 뿐이었다. 결국 나는 기다란 팔로 그 의식을 거무줄처럼 찢어 버렸고, 그럴 때마다 안니는 나를 증오했다.

 

 우리 사회는 인간의 실존보다는 본질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처음 만나면 나이가 어릴 때는 학교를 어디 다니는지 나이가 들어서는 직장이 어디인지를 물어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입은 옷, 그 사람이 타고 다니는 차, 심지어 그 사람이 사는 동네를(혹은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통해서 한 사람을 편하게 평가하고 규정하려든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고민을 점점하지 않는 탓인지 아니면 마케팅이 발달하면서 자기를 대신 표현 혹은 규정하기 편한 브랜드 같은 것이 세상에 넘쳐 나서인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가끔 이런 것들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요즘 주말 내내 우리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는 이유도 많은 사람들이 한 인간의 실존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채 못한 채 주변에서 만들어 놓은 본질만 바라본 결과 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공산주의와 휴머니즘에 대한 생각 같은 것도 들어있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 하다보면 왜 사르트르가 노벨상의 수상을 거부했는지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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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베르테르 효과라는 용어가 탄생하고 롯데 그룹의 이름의 모태가 된 여인 로테가 등장하는 소설을 괴테는 고작 25살이라는 나이에 고작 14주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필독 도서라는 이유로 한번 읽었던 적이 있는데 사실 당시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그로 부터 10년도 넘은 후 읽어보니 글을 어마어마하게 잘 쓰여졌다는 생각과 함께 책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10년 동안 나도 그저 놀지만 않았는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생각을 하고 느껴보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도 체험한 것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괴테가 "친화력" 이라는 작품에서 쓴 글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자신과 자신의 친구의 이야기를 조합하여 쓴 글이다. 그래서 더욱 더 공감이 가는 것일까?

 

2. 책의 내용

 

 고향을 떠나 젊고 여유와 학식을 갖춘 그러나 계급 가치와 같은 기존의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 베르테르, 이 젊은이가 보자마자 반하여 영혼을 다 바쳐 열열히 사랑하는 여인 로테. 그런데 이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인 로테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

 

 베르테르는 긍정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꽤나 종교적으로도 독실 한 듯하다.

 

 "우리 인간들은 곧잘 불만을 늘어놓기 일쑤죠. 살아가면서 좋은 날은 적고 나쁜 날만 많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매일 내려 주시는 가득한 은혜를 우리가 마음을 열고 누리고자 한다면,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걸 충분히 이겨 낼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 베르테르

 

 "우울함이란 게으름과 무척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것은 게으름의 일종이죠." - 베르테르

 

 그리고 개인의 감정과 마음 먹기에 따라 인생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젊은 이었다. 이런 그가 약혼자가 잠시 여행을 간 틈에 로테에게 사랑을 느끼고 매일 그녀를 지켜보며 행복에 겨워하는데. 불행히도 그녀의 약혼자인 알베르트가 돌아와 그녀의 곁을 차지 함으로써 그의 행복은 막을 내리게 된다.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가 돌아 왔을 때 베르테르는 이미 이성의 힘 보다는 감성의 힘을 훨씬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모해 있다.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이성적인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는 로테 곁을 맴도는 베르테르를 억지로 모욕을 줘 일부러 밀어 내려하지는 않지만 둘 사이에는 의견 충돌이 잦아 진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라고요. 조금 더 분별력이 잇다 한들 격정에 휩싸여 한계로 치닫게 되면 약간의 이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 베르테르

 

 결국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그녀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로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틀림없이 다시 만날 겁니다!" - 베르테르

 

 사랑이라는 감성의 지배를 받던 베르테르는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나가 일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베르테르는 인부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 받고 사회에 잘 적응 하는 듯 하지만 하지만 결국 인습을 거부하는 그의 태도는 벽에 부딪혀 사회에서도 도태 당해버리고 만다. 실의에 찬 그는 결국 공직 사회에서도 밀려버리고 다시 로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얼마 전부터 나는 무척 예의를 차리게 되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더군요. - 베르테르

 

 그는 예전에 그곳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다.

 

 까닭은 잘 모르겠지만 전과 같은 분위기가 나지 않아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지 않네 - 베르테르

 그냥 내가 영주라면! 내가 정말 영주라면, 내 관할 안에 있는 나무들 정도야! - 베르테르

 

 로테 때문에 번민하고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두 남자를 만나게 된다. 일전에 보았던 과부 주인을 사랑하는 하인 남자, 그는 결국 과부에게 사랑 고백을 했지만 거절 당하고 쫓겨났고 종래에는 새로운 하인을 죽이는 일을 저지른다. 그리고 또다른 한남자는 로테를 사랑했지만 실패하여 미쳐버린 한 남자이다. 이 둘은 베르테르가 선택할 수 있는 두가지 선택의 결과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전에 말했던 감정에 극한에 몰려버린 그저 인간의 모습을 말이다.

 

 베르테르는 고민한다. 그리고 로테 역시 자신의 감정으로 인해 혼란을 느낀다. 오직 알베르트 만이 여전히 이성적인 듯 하다. 결국 베르테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로테에게 편지를 남기고는 그녀가 하인에게 건내 준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다. 사랑받은 그녀에게나 사랑한 그에게나 비극이다.

 

3. 마치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계몽주의의 합리적인 감정 절제에 반발하여 극단적인 감정을 자유로이 표출한, 독일 문학의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 운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고 한다.

 

 이상하게 어느 시대에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제한 받았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로마시대에는 병사들의 결혼을 막기도 했고 중세 교회야 말 할 것도 없고 (아.. 기사도에 의한 사랑은 예외인가?), 위에서 말하는 계몽주의 시대나 심지어 요즘 역시도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삼포세대' 라는게 나타나니 말이다.

 

 사랑을 만나고 점점 변해가는 베르테르의 모습을 '서간(편지)' 형식으로 섬세하게 그려내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우울과 같은 개인의 감정을 조절 할 수 있다고 믿던 베르테르가 로테를 만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감정에 대한 생각이 변해가고 결국은 어찌보면 변하기전 베르테르와 비슷하다고 할 수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알베르트와 대립하고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감정에 혼란스러워 하며 괴로워하는 로테, 안타깝게도 이 여인의 아픔을 헤아려주기엔 이 두 남자가 각자 자기 일로 너무 나 바쁘다. 그녀야 말로 어머니로 부터 물려 받은 임무와 사회적 인습에 짖눌려 있는 제대로 감정조차 표출하지 못하는 이 책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로테가 아닐까?

 

 알베르트는 로테의 생명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함께 가지 못했습니다. 인부들이 시신을 운구를 메고 갔으며, 성직자는 한 사람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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